[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22] 조선의 혼군(昏君) 광해군 “국정 운영 잘했으나 왕권 욕심에 패륜 저질러 몰락”

임진왜란 때 의병 모아 싸운 ‘젊은 왕자’… 백성에게 절대적 지지

이복동생 영창대군과 계모 인목왕후 죽게 하고, 부정부패 일삼아

광해군의 생애를 다룬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의 한 장면. 광해군은 제주에서 18년간 유배 생활 끝에 사망했다.
광해군의 생애를 다룬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의 한 장면. 광해군은 제주에서 18년간 유배 생활 끝에 사망했다.

[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光海君·1575~1641년)은 용맹하고 영특했다. 임진왜란 때 그는 의병을 모아 왜병을 물리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조선 제14대 국왕·1552~1608년)는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의주로 피신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있는 곳을 ‘대조’, 아들 광해군이 있는 곳을 ‘소조’로 칭하며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를 행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일본군이 진격해오는 통로인 강원도 이천으로 가라고 명했다. 광해군은 20일 동안 노숙하면서 의병을 모아 일본군의 전진을 막았다. 당시 수령들도 도주했다가 광해군의 항전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관직으로 돌아오고, 의병들도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 일본군의 승기가 꺾였다. 젊은 왕자가 백성들과 함께 싸우는 모습은 감동적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광해군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한때는 대동법 실시한 ‘현군’이기도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後金·청나라) 사이에서 슬기로운 외교를 펼쳤다. 명과 후금이 치열하게 전투 중일 때 명이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조선의 입장은 난처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명과 후금의 국운을 감지했다. 명은 지는 해인 반면 후금은 상승 기류를 탔다. 

광해군은 후금의 승리를 예견하고 애매모호한 조치를 취했다. 무사가 아닌 통역을 전문으로 하는 강홍립(姜弘立·1560~1627년)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하라”며 “너무 열심히 싸우지 말고 싸우는 시늉만 하라”고 명했다. 항복해도 좋으니 후금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한 것이다. 

광해군의 판단대로 후금은 조선이 명을 좇지 않고 자신들과 친교를 맺을 뜻이 있음을 확인하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 때는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역사가들은 만약 인조가 광해군처럼 좀 더 현명했더라면 두 전란을 당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평가한다.

광해군은 한때는 새로운 세금 제도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을 이롭게 한 현군(賢君)이기도 했다. 기존의 공물법은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으로 폐해가 많았다. 가령 영광굴비를 가져오라고 해도 굴비가 잡히지 않을 경우도 있었다. 이런 점을 노리고 공물을 대납하고 대신 몇 배의 이익을 남기는 방납인((防納人)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이런 병폐를 막기 위해 광해군은 백성이 소유한 토지에 따라 쌀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대동법을 만들었다. 땅이 많은 이는 더 내고 적은 이는 덜 내게 해 공물의 기준이 정확하고 통일됐다.

광해군은 또 조선의 지리와 풍속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해 ‘경국대전’, ‘삼강행실도’ 등을 복구하고 편찬했다. 무기 제작 상황을 그린 ‘화기도감의궤’를 편찬하고, 선조와 광해군의 어의였던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쓰도록 했다. 

◇말년에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어 

이렇듯 능력 있고 나라와 백성을 위했던 임금이 어떻게 혼군(昏君)이 돼 탄핵 됐을까.

광해군은 후궁에게서 태어나 적장자가 아니었다.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아이 없이 일찍 사망하면서 광해군이 왕세자가 됐다. 선조는 뒤늦게 51세 나이에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仁穆王后·1584~1632년)를 맞았다. 두 사람 사이에 적장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년)이 태어났으나 갑자기 선조가 사망하면서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영창대군은 3세였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대신들이 들고일어나 왕좌를 빼앗을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중 1613년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의 주동으로 광해군과 세자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죄를 씌워 김제남을 처단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뒤 골방에 갇혀 증살(蒸殺·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임)했다. 당시 나이 8세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목왕후를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키고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인목왕후는 새가 물어다 준 곡식을 심어서 수확해 밥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은 풍수지리를 신봉해 무리하게 궁궐을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했고, 경복궁 자리에 10배나 되는 인경궁을 새로 지으려 했다. 궁궐을 짓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만 주면 관직을 부여했다. 상궁 하나가 비선 실세가 돼 인사권을 장악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던 것이다.  

광해군은 결국 1623년 3월 13일 새벽, 인조(仁祖·조선 제16대 국왕·1595~1649년)가 주동이 돼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좌에서 쫓겨났다. 이후 강화도 교동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 간 뒤 그곳에서 무려 18년을 살았다. 

유배 당시 광해군은 시중을 들던 관비에게조차 무시당했다. 관비가 밥을 제대로 주지 않자 광해군이 “내가 그래도 한때는 왕이었는데 네가 이렇게 대접하면 되겠느냐”고 하자 관비가 “그러니까 왕으로 계실 때 좀 잘하시지 왜 이제와서 저한테 뭐라 그러십니까”라고 반격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담배 냄새를 싫어해 궁궐 내 금연을 실시한 임금이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나이 어린 사람도 노인들 앞에서 맞담배를 피웠으나 광해군이 이를 금지하는 예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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