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23] 조선의 혼군(昏君) ‘선조’ “백성보다 자기 안위부터 챙겨… 명나라로 망명하려”

임진왜란 때 환관들 데리고 한양 떠나…한강 건너자 배 침몰시켜 

전쟁 공신 책봉 과정에도 문제 많아…이순신 미워하고 원균 우대

TV 드라마 ‘징비록’에서 선조로 분한 김태우. 선조는 의병장을 공신으로 책봉하지 않고 자기와 같이 피난 간 환관을 공신으로 책봉하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였다.
TV 드라마 ‘징비록’에서 선조로 분한 김태우. 선조는 의병장을 공신으로 책봉하지 않고 자기와 같이 피난 간 환관을 공신으로 책봉하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였다.

[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宣祖·1552 ~1608년)는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으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왕위 계승은 적장자(嫡長子·정실부인이 낳은 적자 중에서 첫째 아들)라는 원칙을 깬 첫 번째 사례이다. 

명종(明宗·조선 제13대 국왕·1534~1567년)은 인순왕후 심씨(1532~1575년) 사이에 하나뿐인 아들 순회세자를 두었으나 순회세자가 13세에 요절했다. 명종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고 일찍 사망했는데, 생전에 아버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의 소생인 덕흥군(德興君·1530~1559년)의 세 아들 중 막내인 하성군(선조)을 왕세자로 점찍었다. 하성군은 인순왕후의 지지에 힘입어 적장자가 아님에도 무난히 왕위에 올랐다. 바로 선조이다.  

선조가 혼군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애민(愛民) 정신의 결핍이다. 그는 임진왜란(1592~1598년)이 발발하자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피난을 떠나려 했다. 신하들과 백성은 임금이 한양을 지킬 것을 원했으나 무시했다. 그러자 민심이 들끓었다.

선조수정실록(1592년 4월 14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왕의 가마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 버렸다.” 

◇명나라에서 망명 안 받아줘

피난 과정에서 선조는 냉혹하고 비정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한강을 건너고 나선 배를 물에 가라앉혀 그를 따르던 신하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선조실록(1592년 4월 30일)은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밤은 칠흑처럼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까지 닿았다. 상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반이 넘었다”고 적고 있다. 

선조는 5월 7일 평양에 도착했다. 유성룡과 이원익 같은 신하들이 평양에서 성을 사수하자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의주로 곧장 날아갔다. 선조는 처음부터 명나라로 망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명에서 선조가 오는 것을 막았다. 선조가 명나라로 오면 전쟁이 중국까지 확산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선조가 혼군이 된 두 번째 사유는 전쟁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공적의 크고 작음 따위를 논의하여 그에 알맞은 상을 줌) 과정에서 드러난 판단·분별력 부족이다. 선조는 자기와 함께 피난한 대신, 내시, 의관 등 86명을 ‘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고 칭하고 상을 내렸다. 이에 반해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킨 신하와 무사들은 고작 18명(선무공신·宣武功臣)에 그쳤다. 곽재우나 의병장들은 공신으로 책봉되지조차 못했다. 

◇기분 나쁘단 이유로 정철 유배 보내

특히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고 리더십이 부족한 원균을 이순신과 나란히 1등 공신으로 책정하면서 어떻게든 이순신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선조실록(1596년 6월 26일)에 선조의 심리가 잘 드러나 있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동궁이 남으로 내려갔을 때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불러도 오지 않았다’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원균이 당초에 사람을 시켜 이순신을 불렀으나 이순신이 오지 않자 원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청하여 성공하였는데 도리어 공이 순신보다 위에 있게 되자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벌어졌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자인가?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선조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관동별곡’ 저자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7 ~1594년)의 유배 건이다. 조선의 왕 중 선조만큼 자주 왕위에서 내려오겠다고 말한 인물이 없다. 임금이 선위를 할 때마다 신하들은 “아니되옵니다, 아직 건강하시고 춘추가 한창이신데 어찌 우리는 버리시나이까”하고 극구 말려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조가 입버릇처럼 또 선위를 말하자 정철이 참지를 못하고 “그렇게 힘드시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도 좋을 듯 하옵니다”라고 말해 유배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선조는 그 밖에도 국제 정세 판단을 잘못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임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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