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2주년 기념 화보]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6·25전쟁 62주년 기념 화보]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 안종호 기자
  • 승인 2012.06.22 15:20
  • 호수 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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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국군장병들이 전투를 대비해 사격연습을 실시하고 있다.
▲ 1950년 6월 25일 공산군의 기습남침 모습.
▲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국군용사들.
▲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는 저격능선에서 공군과 육군이 합동작전을 펼치고 있다.
▲ 1950년 11월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 40군단.
▲ 평양북방에 낙하하는 공수부대.
▲ 1950년 12월 16일 흥남부두 수송선을 기다리는 피난민들.
▲ 1950년 12월 3일 평양, 파괴된 대동강 철교로 피란민들이 남하하고 있다.
▲ 1951년 1월 6일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 전쟁을 치르고 폐허가 된 서울거리.
▲ 옹기종기 모여 있는 피난민촌 모습.
▲ 전쟁터에서 죽은 아들의 시신을 보고 슬퍼하는 어머니.

내가 겪은 6·25전쟁, 후세에 전하고픈 비극의 역사


▶전세권(84·당시 22세·서울 안암동)
6월이 되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많은 영령에 대한 추모의 정과 명복을 비는 마음 간절해진다는 전세권 어르신. 그는 6·25전쟁을 말그대로 “동족상잔의 비극”이라 말한다. 15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국토는 둘로 나뉘며 엄청난 희생과 손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미국 제24단이 낙동강 방어전선에 투입됐을 때, 전세권 어르신은 학생신분으로, 통역원을 자처했다. 전쟁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한 그는 고향에 돌아와 해병대 사관후보생으로 자원입대했다.
3개월의 기초 군사훈련만 받은 후 곧바로 전쟁터로 나갔다. 당시 첫 임무는 2010년 북한의 도발이 있었던 서해 최북단 백령도를 사수하는 것. 북한침투 명령이 내려졌을 당시 동기생의 3분의 1이 투입되자마자 죽음을 맞았다. 모든 전투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오가는 공포 그 자체였다. 동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수많은 청년들은 ‘국가를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는 각오로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 나갔다”며 “오늘날의 번영된 조국, 그리고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나라사랑을 몸소 실천한 국가유공자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군대와 인연을 맺은 후 30여년간 해병대에서 근무했고, 대령으로 만기 전역했다.

▶최명현(가명·90·당시 28세·경기 의정부)
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최명현 어르신은 60여년을 불구로 살아왔다. ‘6·25’란 말만 들어도 당시의 비참한 상황이 떠오르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당시 최 어르신은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최전방에 자진 입대했다. 강원 철원에 배치된 그는 남·북한군이 첨예하게 대치된 상황을 아직도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다. 능선을 사이에 두고 총탄이 빗발처럼 오고가는 상황. 전우들의 피로 강물이 새빨갛게 물들고, 파편자국으로 저격능선은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시체가 즐비한 전쟁터에서는 졸리고, 배고프고, 아프다는 감정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에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그런 생각들은 사치에 불과했다.
“두 다리를 잃은 아픔보다 함께 최전방에 자원입대했던 형을 전쟁터에 묻고 홀로 살아 돌아온 죄책감에 수 년 동안 잠을 설쳤다. 지금도 이맘때면 전쟁의 악몽을 꾼다.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전쟁을 치른 후 남는 건 아픔과 상처뿐이다.”

▶김유필(84·당시 22세·경북 김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절대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참전용사들의 값진 희생 덕분이란 사실을 교육을 통해 후세에 바로 알려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고향 경북 김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던 김 어르신은 사범대 출신으로 입대가 보류됐다. 이후 ‘대피령’이 떨어지자 10여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북한군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 이동했다. 들판이나 빈 집에서 쪽잠을 잤고,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그저 감사했다. 하지만 낙동강을 건너려는 순간, 바로 앞에서 다리가 폭격되는 바람에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모진 고생 끝에 고향에 돌아오니 학교와 집이 폭격을 당해 쑥대밭이 돼 있었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애국이라는 생각에 공터에서 수업을 재개했다.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야외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평생을 교직에 몸 담았지만 그 때만큼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배웠던 적은 없었다.
그는 “전쟁은 어떤 이유라도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전쟁을 몸소 체험한 우리 세대가 후세에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박금임(81·여·당시 19세·전남 해남군 옥천면)
전라남도 해남의 시골마을로 시집 온 이듬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터라 불안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아버지와 남편까지 군대에 징집돼 전장에 나가고 시어머니를 비롯한 어린 시동생들만 남아 집을 지켰다. 밤이면 전투기가 커다란 굉음을 내며 비행하다 이따금씩 포탄을 떨어뜨렸다. 인근 마을에 포탄이 떨어져 마을 하나가 쑥대밭이 됐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집 앞에 땅굴을 파고 그 곳에서 숨어 지내야만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식량이었다. 지리적으로 육지의 최남단, 곡창지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군량미 확보를 위해 집집마다 군인들이 돌아다니며 쌀 한 톨까지 모두 수거해갔다. 근 1년 간 보릿가루를 물에 불려 죽만 끓여 먹었다.
다행히 첫 아들을 무사히 출산했고, 남편도 전쟁이 끝나고 건강하게 돌아왔다. 하지만 마을에는 전장에서 남편이 숨져 미망인 된 새색시들이 많았다.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던 친구를 달래는 몫도 박 어르신의 몫이었다.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슬픔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었다.

▶허 강(76·당시 14세·경기 화성 향남읍)
6·25전쟁 이후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는 60여년 만에 ‘세계 11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6·25전쟁은 아픔과 슬픔의 역사인 동시에 대한민국 성장신화의 발판이 됐다. 그 이면에는 현 노년세대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려있다.
허 강 어르신에게 전쟁은 가장 어둡고 비참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늘 불안에 떨며 매일 먹고, 자는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행여나 가족들이 전쟁터에서 죽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4살. 순박한 시골 꼬마에게 전쟁은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동량질도 해보고, 풀뿌리도 뜯어 먹었다. 또 밤이면 북한군이 쳐들어올까봐 부엌 다락방에 숨어 자곤 했다. 불안한 마음에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가을에는 빽빽한 목화밭에 숨어 지내고 겨울엔 땅굴을 파서 그곳에서 생활했다. 군인들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호롱불도 켜지 못하고 늘 숨죽인 채 살아야만 했다.

▶김창수(75·당시 13세·서울 강북구 우이동)
“어릴 적이지만 전쟁에 대한 기억은 오로지 공포와 두려움뿐이다. 전쟁이란 비극의 역사는 절대로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
철부지 어린 시절에 겪은 전쟁에서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놓치지 않는 것뿐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내려와 마을을 모두 불 질렀기 때문에 자다가 허겁지겁 어머니 손에 이끌려 피난을 떠났다. 인민군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울창한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땅을 파거나 큰 나무 틈 속에 숨어 지냈고, 나무뿌리로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피난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전쟁은 극심한 두려움과 가난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3년여의 전쟁이 끝난 후, 서울의 모습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최근 일본 대지진을 연상시킬 정도로 서울시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됐고, 전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잿더미 위에 집을 다시 짓고, 농사도 새로 지어야만 했다. 극심한 가난과 싸웠고,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도 싸워야만 했다.
정리=안종호 기자 / 사진제공=한국고령자정보화교육협의회 서울 원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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