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나이에 삼국사기 편찬…삼국의 역사‧인물 밝혀준 유일한 사서
일식 등 천체 관측 기록 정확히 일치해… 일본은 반 이상 엉터리
[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우리 선조가 남긴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이다. 먼저 신라·고구려·백제 등 삼국의 역사는 물론 그 이전의 역사까지를 기록한 최고(最古)이자 유일한 사서(史書)이다. 만약 이 책이 없었다면 삼국시대는 깜깜이였을뿐더러, 그 시대를 알려면 우리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한 중국·일본의 조작된 사서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모든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정확히 근접해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삼국사기에는 천문 현상을 관찰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들이 실제 자연 현상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총 266회의 천문 관측 기록이 있다. 일식에 관한 것(일유식지·日有食之), 유성이나 운석이 떨어진 것(유성범심·流星犯心), 혜성 출현에 관한 것(혜성출‧彗星出) 등이다. 도대체 망원경도 없던 시대에 어떻게 이런 관측이 가능했던 것일까.
주기적·반복적으로 움직이는 행성은 맨눈으로도 확인 가능하다고 한다. 천문학자들 말로는 일식이나 월식, 오행(수성·화성·목성·금성·토성 등) 결집 등이 몇만 년 후에 일어날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과거 몇 만 년 전에 일어났는가를 예측하는 일이 컴퓨터로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B.C.54년 신라 혁거세 4년 때 일어난 일식 기록을 현재 컴퓨터로 확인한 결과 정확히 일치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천문 관찰 기록을 연구한 박창범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는 “1800년 전 기록이 현재 계산으로 확인이 된다”며 “그 기록들이 신기하고 대견하게도 생각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고대 천문 기록이 한·중·일에만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세 나라의 일식 기록을 조사했다. 전체적으로 삼국사기 기록은 80%가 실제로 일어났고, 중국은 70%, 일본은 45%로 일본은 반 이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박 교수는 ”특히 삼국사기의 서기 200년까지 초기 기록은 89%가 실제로 일어나 삼국사기가 주변 국가의 다른 사서보다 신뢰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금성이 달에 가려지는 현상 관측도 기록
삼국사기만의 독자적인 기록도 있다. 태백성(금성)이 달에 가까워지는 현상(태백범월·太白犯月), 금성이 달에 가려지는 현상(태백입월·太白入月) 등이다. 낮에 육안으로 금성을 관측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 하늘이 짙푸른 빛을 띠는 가을과 겨울 등 계절적 조건을 만족하고, 금성이 밝아지는 주기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이 두 가지를 충족한 상태에서 금성을 관측했다. 실제로 삼국사기 224년 12월 금성의 밝기는 놀랍게도 금성이 밝아지는 주기와 일치했다.
마지막으로 저자 김부식(金富軾·1075~1151년)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의 나이가 70이었다는 사실이다. 김부식은 고려 제17대 국왕 인종(1109~1146년) 때 활동했던 문신이자 정치가, 역사학자이다.
1096년 21세에 과거에 급제해 첫 벼슬을 받았다. 당대 석학들의 집합소인 한림원의 직한림을 거쳐 문하시중(재상)을 했다. 그는 전쟁에도 참여한 경험이 있다. 묘청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난(묘청의 난·1135년)을 일으키자 왕의 명령을 받고 진압하기도 했다.
그는 관직을 떠난 뒤 인종의 지시로 1145년에 최산보·이은문·허홍재 등 11명의 편사관과 이 책을 편찬했다. 1000년의 세월에 걸쳐 삼국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 핵심 인물의 행적 등을 책 50권 분량에 담아내는 건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낼 엄청난 일이다.
◇무령왕릉의 지석에 쓰인 글귀와 일치
삼국사기는 크게 본기, 열전, 연표, 지, 서 등으로 이뤄져 있다. 본기에는 각 나라 왕들의 연대기 즉 왕위 계승과 관련된 주요 사건을 다루고, 열전은 주요 인물들의 생애를 기록했다. 연표는 연대별 사건을 나열한 것이고, 지는 제도와 풍속을 설명하며, 서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을 소개했다.
삼국사기는 유교적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해 신화적·불교적 색채가 강한 삼국유사(三國遺事)와는 구별된다. 만약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광개토대왕이 주변 국가를 어떻게 정복했는지,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당나라와의 복잡한 외교 속에서 어떻게 삼국을 통일했는지,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맞아 살수에서 어떻게 대승을 거뒀는지 등에 대해 알 길이 없다.
삼국사기 기록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가 1972년 충남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志石)이다. 거기에 “백제 사마왕은 23년을 재위하다 62세에 사망했다”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편과 일치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서문에서 “중국 역사서는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다”라고 우리만의 역사서가 필요한 이유를 밝혔다. 이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겨우 책을 완성하였지만 볼만한 것이 되지 못하였으니 그저 저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라고 겸손함도 보였다.
김부식은 끝으로 “명산에 보관하기엔 부족하더라도 간장 항아리를 덮는 데 쓰이지는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삼국사기의 가치와 소중함을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