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가출, 금강산 마가연에 들어가 ‘석담’ 법명으로 용맹정진
선조에게 고하길 “나같이 불교에 깊이 중독된 사람 없을 것”
[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년)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년)과 관련해 몇 가지 눈길이 가는 부분이 있다. 우선 우리나라 화폐에 나란히 초상을 올린 최초의 모자(母子)라는 점이다. 이이는 5000원권에, 신사임당은 5만 원권에 얼굴이 들어가 있다.
두 번째, 모자의 묘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율곡 선생 유적지’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이 유적지에는 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을 비롯해 이이의 위패를 모신 사당 ‘자운서원’(慈雲書院)과 신사임당 사당, 가족묘 등이 있다. 가족묘에는 이이의 묘와 부인 곡산 노씨 묘, 이이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이이의 형 이선 묘 등 14기가 조성돼 있다.
부인 묘는 남편 묘보다 조금 위쪽에 있다. 여기에 참담한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노씨와 하녀 한 명이 이이의 묘소 주변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왜군이 두 여인을 겁탈하려고 하자 자결로써 항거했다. 전쟁이 끝난 후 후손들이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누가 부인이고 누가 하녀인지 분간할 수 없어 둘을 합장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점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년)과 더불어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가 무슨 이유로 불교에 귀의할 생각을 했을까.
◇주류 사회에서 벗어나 이단의 길 걸어
이이는 조선의 천재이다. 13세에 처음 생원시 초시에 붙은 것을 비롯해 한 해에 7차례 장원급제를 하는 등 총 아홉 번 과거시험에 합격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선조 재위 때 정5품 홍문관 교리로 시작해 호조·이조·병조판서를 거쳐 종1품 의정부 찬성까지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이는 16세 때 수운판관(水運判官)인 아버지의 평양 출장에 따라갔다. 그 사이에 어머니가 병으로 갑작스레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이는 누구보다 부모를 끔찍이 모시는 효자였다. 이이가 5세 때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한 시간씩 기도를 올렸다. 신사임당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도 이이가 어머니의 일대기를 글로 남겼기 때문이다.
이이는 3년간 시묘살이를 끝내자 바로 집을 나서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 들어갔다. 19세였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유학을 국시로 한 조선에서 파격적인 선택으로 주류 사회에서 벗어나 이단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불교 전력으로 평생 정적들에 시달려
‘석담’(石潭)이란 법명을 가진 이이는 ‘살아있는 부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용맹정진(勇猛精進)했으나 불교에서 속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1년 만에 승복을 벗고 속세로 돌아왔다. 하산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 위나 아래나 매한가지
이는 색도 아니요 또한 공도 아니라네
실없이 한번 웃고 내 신세 살피니
석양에 나무 빽빽한 수풀 속에 홀로 서 있었네
연비어약상하동(鳶飛魚躍上下同)
저반비색역비공(這般非色亦非空)
등한일소간신세(等閑一笑看身世)
독립사양만목중(獨立斜陽萬木中)
이이는 후에 자신의 불교 전력에 관해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을 잊고자 불교를 탐독하다가 산으로 달려가 1년간 선문에 종사했습니다. 그런데 잘못을 깨닫고는 죽도록 부끄럽고 분함을 느꼈습니다. 불교의 도에 중독된 사람 가운데 신처럼 깊이 중독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이는 다시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기도 했다. 자경문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말을 줄이며, 홀로 있어도 삼가고, 독서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등 스스로를 경계하는 11조의 수양 지침을 담은 글이다.
이이는 불교 전력으로 평생을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렸다. 이이는 병을 얻어 관직을 내려놓고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에서 요양하다 한성부 대사동 자택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48세 일기로 눈을 감았다. 파주시는 매년 10월 초에 이이 유적지에서 율곡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율곡이란 호는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