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127] 경기도 연천에 있는 기황후 묘지 터 “재궁‧석물 2기‧기와 조각…묘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

고려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순황제 아들 낳고 제1 황후 돼

명나라 주원장에 쫓겨 황제와 북쪽으로 도주…고려 입국설

기황후의 묘지 터를 알리는 표지판. 일대에 기황후의 묘와는 상관없는 일반 묘들이 모여 있다.
기황후의 묘지 터를 알리는 표지판. 일대에 기황후의 묘와는 상관없는 일반 묘들이 모여 있다.

[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기황후(奇皇后·1315~1369년?)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여인이다. 그는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고, 그곳에서 최고의 부와 권력을 누리다가 가장 낮은 곳까지 추락했고, 마지막에는 ‘행불자’ 신세가 됐다.  

고려 공녀(貢女)인 그는 원나라 황제의 부인이 돼 중국과 고려 두 나라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중국에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북쪽으로 도주한 후로는 생사조차 묘연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고, 무덤의 존재 여부마저 확인이 안 된다.

기황후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인 중국의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고려 충렬왕 때 경기도 고양시 행주동에서 아버지 기자오(奇子敖)의 5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1333년 18세 때 원나라에 끌려갔다. 원나라의 요구로 고려는 80년간 50여 차례 과부나 처녀들을 보냈다. 한 번에 10~50명, 많게는 500명까지 차출됐다. 이들을 뽑는 ‘결혼도감(結婚都監)’이란 기관까지 있었다. 기황후도 이 중 한 명이었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인 고용보의 추천으로 궁녀가 됐다. 처음에는 원나라 제11대 순황제(順皇帝)인 혜종(惠宗·1320~1370년)의 차와 다과를 담당하는 시녀였다. 그러다 우연히 혜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됐다. 기황후는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총명하고, 학식도 갖췄다고 한다.

기황후가 황제의 총애를 받자 혜종의 제1 황후인 타나실리가 질투했다. 타나실리는 기황후를 구타하고 인두로 지지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 폭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1335년 6월에 타나실리의 남매인 텡기스와 다르카이 일파가 모반을 꾸민 혐의로 멸문당하면서 타나실리도 황후 자리에서 쫓겨났고, 유배길에 올라 15세의 나이로 독살당했다. 

혜종은 기황후를 새로운 제1 황후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실권자였던 바얀이 “몽골족이 아닌 여성을 제1 황후로 삼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혜종은 기황후 대신 바얀 후투구라는 몽골 여성을 제1 황후로 삼았다. 

기황후 초상.
기황후 초상.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 심해  

어느 날 기황후가 임신했고, 1338년 혜종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출산하면서 황실 구도가 바뀌었다. 바얀이 실각하자 혜종의 국사였던 사라판이 기황후를 제2황후로 책봉하기를 청함으로써 기황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기황후는 제1황후의 꿈을 실현하고자 측근을 동원해 혜종을 압박했다. 혜종은 처음에는 비답을 내리지 않고 시간을 끌다가 결국에는 손을 들고 기황후를 제1 황후 자리에 앉혔다. ‘원사’(元史)는 혜종의 말을 이렇게 기록했다. 

“너 설렁거(肅良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 와서 짐을 받들어 섬겼다. 너는 항상 조심하고 삼가면서, 밤낮으로 언제나 신망이 두텁고 성실했다. 너는 긴 세월을 생활은 검소하고 사람들에게는 공손하게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중궁(中宮)의 지위가 마땅히 현명한 처(妻)인 너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황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이 모두 너를 황후에 봉하라고 간청하고 있다. 액정(掖庭)의 궁녀들도 모두 너를 존경하여 따르고 있다. 그런데 너 기씨는 여러 차례 겸손하게 이를 사양하니, 네 뜻이 더욱 가상하다. 아! 너는 궁정의 일들을 신중하게 다스려, 충심으로 짐을 더욱더 잘 보좌할 수 있도록 힘써라. 너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을 더욱 환하게 밝히고 계속 이어 나가서, 함께 우리 조정의 홍복(洪福)을 보존하도록 하라.” 

◇연천군, 묘지터 향토문화재로 지정

고려는 기황후 덕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피해만 입었다. 고려가 원나라에 보내는 공물의 양이 오히려 늘었을뿐더러 내정간섭이 심했다. 거기에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비롯한 권문세족이 덩달아 패악질을 일삼았다. 이를 보다 못한 공민왕이 1356년 병신정변을 일으켜 기철과 그 가족, 측근들을 모두 귀양보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기황후는 격노해 1363년 12월 덕흥군 왕혜를 고려의 국왕, 조카 기삼보노를 고려의 왕세자로 삼고자 원나라 군대 1만여 명을 보내 고려를 침공했다. 이때 이성계와 최영이 이들을 물리쳐 공민왕을 살렸다.

기황후의 득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황후가 제1황후가 된지 2년 8개월만인 1368년, 주원장(朱元璋·1328~1398년))이란 이가 중국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 수도 대도(북경)로 쳐들어왔다. 주원장은 대도를 함락하고 명나라를 세운 뒤 초대 황제가 됐다. 혜종과 기황후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 응창부로 도망쳤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지리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경기도 연천에 기황후의 무덤이 있다고 전하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기황후는 혜종을 따라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연천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 산145의 야트막한 산 구릉에 ‘전 기황후 릉터’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묘지 터 바로 앞까지 이어져 있다. 표지판 뒤로 이어지는 밭을 지나면 민묘 몇 기가 나타난다. 이 묘들은 기황후와 상관없는 일반인의 묘이다. 

1993년 연천군이 이 일대를 조사한 결과 석물 2기를 비롯해 고려청자와 기와 조각 여러 점이 발견됐다. 연천군은 “기와 파편 등이 많이 분포돼있는 것으로 봐서 제사를 지내는 재궁(齋宮)이 있었던 것으로 추청한다”며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이 터를 향토문화재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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