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 묘 바로 뒤편 청송 심씨 가족묘… 윤씨 측, 심씨 조상에 절하는 셈
청송 심씨, 파평 윤씨 측이 제공한 2500여 평에 가족묘 이전하기로 합의
[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로에 왕릉에 버금가는 거대한 묘역이 있다. 고려 예종 때 여진족을 혼내준 윤관(尹瓘) 장군(1040~1111년)의 묘지이다. 면적이 무려 1만6000여 ㎡로 5000여 평에 이른다. 박달산 자락에 위치한 묘 앞으로 수백 m 완만하게 펼쳐진 구릉, 그 끝에 흐르는 임진강, 묘 뒤로 울창한 소나무 숲 등이 풍수에 문외한인 이의 눈에도 명당으로 보인다.
묘역에는 봉분·묘비·곡장·사당·재각·사적비·석물·교자총(轎子塚·하사받은 가마의 무덤)·전마총(戰馬塚·전쟁에 쓰인 말의 무덤) 등이 나열돼 있어 규모와 시설 면에서도 압도당한다. 그러나 윤관 묘역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하기까지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파평 윤씨 윤관은 고려 개국공신 윤신달의 후손으로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냈다. 여진족을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아 고려의 지도를 넓힌 명신이다. 윤관은 첫 여진과의 전투에서 여진의 기마병에 패했다. 이를 교훈 삼아 별무반을 만들어 재차 정벌에 나서 크게 승리했다.
이후 여진은 끈질기게 9성의 반환을 요구했다. 고려는 성과 성 사이가 멀어 관리하기가 힘들고, 여진이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믿고 성을 돌려줬다. 이 일로 윤관의 말년은 불행했다.
윤관의 반대파들이 “무모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시킨 자”라며 모함하고 탄핵한 끝에 결국 불명예 퇴진했다. 1110년에 예종이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파직한 것이니 내 마음을 받아들여 하루빨리 관직에 나와달라”고 했지만 윤관은 끝내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5월 8일 사망했다. 후에 영조는 윤관의 후손에 7역(役)을 면제하라는 교(敎)를 내리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에 “윤관 장군 묘는 경기도 파주 분수원 북쪽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두 집안은 과거 급제자 수백 명 배출한 명문가
윤관의 묘는 청송(靑松) 심씨가 같은 자리에 묘를 쓰면서 산송(山訟)에 휘말렸다. 산송은 묘 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을 말한다. 1658년 대사원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년)이 국가로부터 이 일대 땅을 하사받아 부친 묘를 비롯한 집안 묘역을 조성했다. 문제는 윤관 묘를 쓴 지 550여 년이 지난 뒤여서 묘지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그 뒤 1764년 이 일대에서 석물을 발굴한 윤관의 후손들이 청송 심씨 집안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분쟁이 시작됐다.
조선 최고의 명문가들의 자존심 한판이기도 했다. 파평 윤씨 집안에서는 문과 급제자 418명, 무과 급제자 317명, 정승이 11명이나 나왔다. 청송 심씨 집안에서는 문과 급제자 198명, 무과 급제자 130명이 나왔다. 두 집안은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기도 했다. 파평 윤씨 쪽에선 세조 비 정희왕후 등 4명이, 청송 심씨는 세종 비 소헌왕후 등 3명이 배출됐다.
두 집안은 임금에게 서로의 주장을 담은 상소를 각각 올렸다. 임금도 두 가문의 국가 기여도 면에서 볼 때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하루는 영조가 한밤중에 두 집안의 대표들을 불러 친국(親鞫·임금이 죄인을 몸소 신문하던 일)했다.
이 자리에서 윤씨 집안의 대표 윤희복이 영조에게 “대왕께서도 문숙공(文肅公·윤관 시호) 외손이 아니십니까”라고 따졌다. 파평 윤씨의 손을 들어달라는 뜻이었다. 이에 영조가 진노해 곤장을 치라고 명했고, 윤희복은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심씨 가족묘, 180여m 떨어진 곳 조성
윤희복의 사망으로 파평 윤씨는 전국의 종친들에게 통문을 띄워 윤관 묘로 집결하라고 호소했다. 이에 청송 심씨도 파묘를 할까 두려워 인원을 동원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영조가 도승지를 급파해 사태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청송 심씨 묘지는 윤관 묘지 바로 뒤편에 위치해 윤씨 사람들이 윤관 묘에 절하면 마치 심씨 조상에게 절하는 모양새가 됐다. 두 문중의 충돌은 매년 10월에 발생했고, 연중행사가 되다시피 했다. 광복 이후에도 두 집안의 분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박정희 정권 때 윤씨 가문에서 육군 모 사단장이 되자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윤관 묘 뒤쪽에 높은 콘크리트 벽을 쌓기도 했다. 이 담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갔다. 이런 가운데 윤관 장군 묘가 1988년 국가사적 제323호로 지정됐다.
이를 계기로 2006년 4월 두 가문이 극적인 화해를 했다. 청송 심씨 측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는 조건으로 파평 윤씨 측에서 이장에 필요한 부지 2500여평을 제공한다고 합의한 것이다. 청송 심씨 가족묘는 윤관 묘로부터 180여 m 떨어진 곳에 조성했다. 이로써 두 가문의 400년 넘은 산송이 마무리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