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 인생의 마무리
[기고] 내 인생의 마무리
  • 관리자
  • 승인 2012.10.1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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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란 기자/성남

 ‘죽음 준비 교육’ 강의를 듣고 돌아가는 세종문화회관의 뒷길,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쓸쓸하고 허무한, 착잡한 심정으로 내 인생의 계절과 죽음을 묵상해봤다.

필자가 처음으로 죽음을 맞닥뜨리게 된 것은 친정어머니의 병환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죽음을 이겨내고 몇 년 뒤 필자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당시 친정아버지는 중풍을 앓고 있어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어머니만 참석해 막내딸인 필자를 안쓰러워하면서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댁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일 줄은 몰랐다.

결혼하고 몇 개월 후, 12월 중순의 어느 날 조카딸이 우체부가 전해준 전보를 받더니 “어머, 이럴 수가….”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얼른 뺏어 읽어보니 ‘모친 사망’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데 정말 기가 막히고 믿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강원도 홍천의 친정으로 내려갔지만, 어머니의 손은 얼음장 같이 차가워진 뒤였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 중풍으로 수족이 편치 않은 아버지는 슬픔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난 뒤 2년 동안을 큰 오빠와 올케의 보살핌을 받다 돌아가셨다. 당시 필자는 젖유종을 앓은 데다, 연년생인 아들들조차 병을 앓아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도 바로 가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라고 위안을 삼으면서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불효를 자책하며 슬픔을 삼켜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몇 년 후에는 큰 올케가 위암에 걸렸다. 해골의 몰골을 한 올케는 아파하면서도 한의사인 올케 동생에게 약을 빨리 지어오라고 할 만큼 생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러나 올케도 병문안 후 일주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미혼이고 학생이던 조카들의 울부짖음이 가슴을 쓰리게 했다.

시아버님은 76세에 소천 하셨는데, 주변 분들은 호상이라고 했다. 아버님은 서울 미아동의 형님 댁에서 성남에 있는 우리 집에 와 몇 달씩 계실 때도 손수 옷을 빨아 입는 등 아주 정갈한 분이었지만, 종종 시아주버님과 형님이 섭섭하게 했던 일들을 말씀하실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다 지나간 일인데요. 마음에 두지 마세요.” 하면서 말을 막았던 것이 후회됐다. 이 외에도 치매로 고생했던 큰 언니, 마음의 기둥이었던 큰 오빠 등이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실에서 어떻게 잘살고 건강하게 살 것인가만 생각해왔다. 이 때문에 늘 과욕을 부리고 이기적인 삶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허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조금 더 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또한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지만 말고, 죽음 교육을 통해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미국 시인 윌리엄 켈렌브라인트가 죽음을 맞는 마음에 대해쓴 시를 소개해본다.

그대 한밤에 채찍 맞으며/감방으로 끌려가는/채석장의 노예처럼 가지 말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떳떳하게 위로 받고/무덤 향해 가거라/
침상에 담요 들어 몸에 감으며/달콤한 꿈나라로 가려고 눕는/그런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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