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도 60년… 양로원·노인대학 등 세워 대한민국 복지 초석 닦아
입도 60년… 양로원·노인대학 등 세워 대한민국 복지 초석 닦아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5.09 10:59
  • 호수 4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 도민과 동고동락 맥그린치 신부

60년 전 돌로 지은 한림성당, 종탑·첨탑 등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유명
제주해녀, 성당 지을 때 나무·돌 운반 도움 많이 줘… 배울 점 많은 여인들

 

제주 목축업을 근대화시켜 도민들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켜준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86)신부. 그가 제주에 온지 올해로 60년이 된다. 1954년 4월, 아일랜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소속돼 한국에 온 그는 반평생 지역 개발, 교육, 복지 사업을 통해 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아왔다. 지난해 12월, 제주 출신의 정·관·학계 80여명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숭고한 정신을 잇기 위해 ‘임피제 신부 기념사업회’ 발기인 대회를 열기도 했다. 임피제는 맥그린치 신부가 1973년 제주도 명예도민이 되면서 지은 한국이름이다. 성인 맥그린치와 이름인 패트릭 제임스의 머리글자 M·P·J에서 따왔다. 주위에서는 그의 입도(入島) 60년 기념행사를 갖고자 했으나 정작 본인의 고사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제주에 첫발을 디딘 후 처음 한 일은 선교가 아니었다. 당시 제주는 일제 강점기 직후 4·3사건과 6·25전쟁을 겪고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도민들에겐 종교보다 먹을 것이 더 필요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황무지였던 제주의 산기슭을 개간해 목장을 만들었다. 그가 일군 성(聖)이시돌목장에선 그동안 돼지·양·소·말을 길러내 제주사람들을 도왔다. 이시돌은 12세기 스페인의 농부 출신 가톨릭 성인 ‘이시도르’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가 한 일은 이뿐이 아니다. 당시엔 개념조차 없었던 사회복지 분야에 힘써 대한민국 복지의 초석을 닦았다. 그는 양로원(1981), 노인학교(1982), 농촌노인복지회관(1988) 등을 잇따라 세우고 노인 복지에 헌신했다. 병원이 없던 시절 한림읍에 복지의원을 세워 병든 이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후에 병원이 많이 생겨나자 복지의원을 성이시돌목장 안으로 옮겨 호스피스병원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양로원은 오랜 전 성이시돌요양원으로 바뀌었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위치한 요양원은 유럽의 별장처럼 외관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무의탁 노인과 독거노인을 보살피는 복지시설로 3명의 수녀와 50여명의 직원이 헌신적으로 어르신 90여명을 돌보고 있다. 깨끗한 환경과 시설에 프로그램 운영이 뛰어나 노인복지시설 평가에서 최상위 우수시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머리가 하얗게 셌고 무릎 관절이 안 좋아 걷는 게 불편할 정도지만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제주 입성 당시 한국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사람들은 나를 두고 ‘미국놈’ ‘미국놈’하고 불렀어요. 나는 그 사람들에게 아일랜드에서 왔으니까 ‘아일랜드놈’이라고 말해주었지요. 제주는 아일랜드와 풍토가 비슷해요. 돌담도, 바람도 많고, 풍습도 비슷해요. 그때는 우체국만 빼고 모두 초가집이었지요. 다들 살림이 궁핍해 겨우 보리밥 먹고 살면서도 아낙들은 달걀과 닭을 가져다주며 파란 눈의 사제를 굶기지 않았어요.”
맥그린치 신부는 처음에 꿩을 사냥해 먹으며 지냈다. 제주에서 기르던 ‘똥 돼지’는 먹지 못했다. 그는 제주사람들이 왜 제대로 가축을 기르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부의 고향집에선 가축을 길렀다. 그의 아버지는 수의사였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 소의 젖을 짰고 집에 와서도 젖을 짰다.
“한국인들은 보리·고구마 농사는 아주 잘 하는데 소·돼지 기르는 걸 잘 못하고 있었어요. 내가 방목하지 말고 목초지를 만들어 그곳에서 기르면 나중에 자가용을 타고 다닐 정도로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지만 할아버지들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는 직접 돼지와 소를 기르기로 결심했다. 신부는 꿩 사냥을 다니다 산중턱에서 우물 한 곳을 발견한 일이 생각났다. 해발 200~600m의 중산간지대로 험한 땅이지만 가축을 기르는데 필요한 물이 있었다. 땅임자를 수소문했더니 한림에 사는 할아버지라고 했다. 땅을 팔라고 하자 땅 주인은 냉큼 팔았다. 쓸모없는 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선교회와 선진국의 자선단체를 설득해 땅과 돼지를 살 돈을 모았다. 그래도 모자라면 아일랜드에 있는 부모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돈을 보내주면서 한번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아들! 선교를 하러 한국에 간다더니 왜 자꾸 돼지와 땅을 사는 것이냐.” 그즈음 맥그린치 신부는 한국 안팎에서 ‘돼지 신부’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현재 175만평의 성이시돌목장에는 한우와 젖소 1000두, 경주마 130두가 사육되고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 목장을 극찬한 일화가 있다. 1960년대 초 맥그린치 신부가 산의 돌들을 치우며 목초지를 개발할 때 정부에서도 송당목장을 통해 축산업 진흥을 꾀하려 했다. 그러나 송당목장은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성이시돌목장 만큼 효율적이지 못했다. 송당목장 현장을 살피던 박정희 대통령은 “왜 이시돌목장은 되는데 송당목장은 안되느냐”고 질책하며 송당목장에 대한 지원을 끊고 민간 불하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목장과 함께 인근 한림읍 한림리에 한림성당을 지었다. 돌로 만든 종탑과 높이가 다른 두 개의 첨탑 등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북제주군 건축상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성당과 관련해 맥그린치 신부는 기적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성당을 지어야 하는데 목재가 없었다. 어느 날 한림 앞바다에 큰 배가 암초에 걸려 좌초했다. 가톨릭 신자이자 아일랜드인 선장은 맥그린치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에서 진상조사단이 사고조사를 하러 오기 전까지 가져갈 수 있는 목재는 다 가져가시오.”
그렇지만 아이가 대부분이었던 25명의 신도들이 옮길 수 있는 목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저 기도만 열심히 하고 다음날 아침 배가 있는 곳으로 나갔다. 그런데 배 주위에 400여명의 남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신도가 아닌데도 소문을 듣고 돕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많은 양의 목재를 가져와 그것으로 성당도 짓고 강당, 사제관도 지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수직물(手織物)사업을 벌여 제주 처녀들의 자립을 돕기도 했다. 그가 이 사업에 손을 댄 건 한 여자 아이의 충격적인 죽음 때문이었다. 1950년대 말 한 여자아이가 신이 나서 신부를 찾아왔다. 부산에 취직해 떠난다는 것이었다. 3개월 후 한 남자가 성당의 문을 두드렸다. 그 남자는 “우리 공장에서 일했는데 물탱크에 빠져 죽었다”면서 그때 그 아이 집을 찾았다.
그가 세운 ‘한림수직’이란 공장엔 많을 땐 제주 여성 1300명이 그곳에서 일했다. 처음엔 실의 굵기가 일정치가 않아 억지로 동료신부들에게 양말을 팔아야 했다. 아일랜드 선교회에 직조 전문가인 수녀 2명을 제주에 초대해 제주 여성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품질 좋은 모직제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에도 소문 나 필수 혼수품이 될 정도였다.
“한때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으나 1990년대 들어온 값싼 ‘메이드 인 차이나’를 이길 수는 없었어요. 홍콩·일본에 수출까지 하던 돼지사업도 돼지 파동 나고 1980년에 그만 뒀고요. 돼지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그냥 공짜로 나눠주었어요.”

▲ 대한노인회 이심 회장이 4월29일, 제주 성이시돌목장을 방문, 맥그린치 신부와 기념촬영했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맥그린치 신부, 리어던 조셉 성이시돌목장 이사장, 이한영 제주해녀문화보존회 회장, 이심 회장.사진 임근재

맥그린치 신부는 목장과 한림수직에서 번 돈으로 병원과 어린이집 등을 세웠다. 젖소를 키워 치즈와 우유를 팔았고, 경주마 생산과 목초사업도 벌였다. 조직이 커지자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를 만들어 이사장 직함으로 활동했다. 2011년 공식적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성이시돌목장에 수의사로 자원봉사 차 1976년 왔다가 제주에 눌러앉은 아일랜드 출신 리어던 마이클 조셉 (60)신부가 이사장 자리를 이어 받았다.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 사람들의 자립을 도운 공로로 1975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으며, 석탑산업훈장(1972), 5·16 민족상(1966)을 수상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헐벗은 도민들에게 필요한 건 종교보다 물질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가톨릭교도로서 의무가 있어요.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두 가지이죠. 그 의무가 있으니 내가 나가서 일해야죠. 그런데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나 너 도와주니 믿어야 한다, 그거 안 되죠. 절대 그렇게 안합니다. 그냥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라, 실천하는 겁니다.”
제주 사람들은 맥그린치 신부가 없었다면 제주도의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달랐을 거라고 말한다. 한 제주 해녀는 “신부님 덕분에 저희가 잘 살게 됐다”고까지 말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자신은 못 입고 못 먹으면서도 물질로 자식과 가족을 부양하는 제주해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며 “성당 지을 때 돌·나무를 운반해주는 등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밝혔다.
맥그린치 신부는 한 번도 한라산을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제주 사람을 위해 헌신하느라 그럴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이가 든 지금은 몸이 따라주지 않아 오르지 못한다. 맥그린치 신부는 반평생을 나눔과 베풂의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할 일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것은 성이시돌병원과 호스피스병원이 좀 더 안정되고 활성화되는 걸 보는 것이다.
“한국에는 호스피스 많이 필요해요. 특히 농촌에서 암이나 병 걸리면 환자 봐줄 사람이 없어요. 가족은 다 밭에서 일해야죠. 큰 병원에는 호스피스가 있지만 돈 있는 사람이 가고 그건 진짜 호스피스가 아니에요. 호스피스의 진정한 개념이 아직 한국에 없어요. 여기 이시돌이 처음일 겁니다.”
성이시돌목장에서 얻는 수입은 전부 성이시돌요양원과 호스피스병원에 들어간다.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의 한 직원은 “정부나 기업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맥그린치 신부에게 제주도는 어떤 곳일까. 그가 산을 개간하면서 아일랜드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에 그 답이 있다. 그는 매번 이렇게 썼다.
“저는 제주도만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제주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