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 대통령, 양복·구두 물려받은 저에게 부모가 자식 대하듯 했어요”
“박 전 대통령, 양복·구두 물려받은 저에게 부모가 자식 대하듯 했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7.25 11:31
  • 호수 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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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육영수’책 펴낸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

1971~79년 두 내외 모셔…‘청와대 변기 속 벽돌’얘기 첫 공개
‘박정희·육영수’책값 3000원… 노인·장애인도 쉽게 보도록

 

▲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
▲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이 펴낸‘가까이에서 본 인간 박정희 인간 육영수’책 표지.

김두영(74) 전 청와대 비서관은 10·26 직후 박정희 대통령

(1917 ~1979)이 변기 물도 아끼려고 벽돌 두 장을 변기통에 넣어 사용했다는 사실을 외부에 처음 공개했다. 그는 1971~1989년 18년간 대통령 제2부속실 행정관, 공보비서실 행정관, 대통령 사정비서관, 정무비서관 겸 국정자문회의 사무처장 등을 역임했다.
김 전 비서관이 박정희·육영수(1925~1974) 내외에 대한 책을 펴내 화제다. 책 제목은 ‘가까이에서 본 인간 박정희 인간 육영수’(대양미디어)이다. 책의 내용 중 일부는 ‘월간조선’(1990년)에 소개된 적이 있다. 책 내용도 감동적이지만 책값이 가상하다. 3000원. 요즘 웬만한 책은 1만원이 넘는다. 180쪽에 문고판 보다 조금 큰 판형이다. 출판계에선 ‘그 정도의 볼륨이라면 7000원대는 돼야 한다’고 전한다.
“최고의 권좌에 있었던 두 내외의 인간적인 모습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새롭게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책을 내게 됐어요. 책값은 노인과 어린이 특히 저소득층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저렴하게 정한 겁니다.”

대한노인회 건물 육여사가 마련
김 전 비서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과 총애는 여느 비서관과 달랐다. 종종 대통령 가족과 식사를 했으며 대통령이 입었던 양복을 물려받아 입기도 했다. 대통령의 낚시에도 따라갔고, 영부인의 탁구 상대가 돼주기도 했다. 대통령과 비서관의 관계가 아닌 가족과 같은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늦게 대학을 마친 김 전 비서관은 육영수 여사가 설립한 육영재단 기획실장으로 있다가 1971년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 직속인 제2부속실 행정관으로 일했다. 제2부속실은 영부인을 보좌하는 기구였다.
“박 대통령은 매서워 보였지만 근본은 마음이 약하고 눈물도 보이는 분이었어요. 데모하는 학생들이나 반정부세력을 다루는 방식이 무자비하지만은 않았어요. 특히 학생들에게는 교사가 회초리를 들고 엄포를 놓는 식이었어요.”
1971년 4월 어느 날, 박 대통령은 국방과학기술원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신설동 부근을 지나다가 서울사범대학생들이 경찰을 상대로 투석하는 시위현장과 맞닥뜨렸다. 대통령 승용차 보닛에 돌이 떨어졌다. 박 대통령은 경호원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차에서 내려 걸어서 사범대 사무실을 찾아갔다. 시위 현장에 몰려있던 상가 주민들이 이 모습을 보고 박수를 쳤다. 학생들은 혼비백산해 학교 건물 뒷마당으로 도망쳤다. 박 대통령은 경호원들에게 “손에 흙 묻은 놈들은 모조리 붙들어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사장에 도착해 모든 행사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오셨어요. 그 시간 100여명의 학생들이 동대문경찰서에 붙들려 와 있었지요. 박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후 그날 안으로 모든 학생들을 훈방시키도록 했습니다.”
김 전 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입었던 양복과 구두를 기쁜 마음으로 수선해 입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옷을 약간 고쳐 입고 출근한 김 비서관의 모습을 보고 무척 흐뭇해했다.
김 전 비서관은 몇 차례 육 여사가 준 박 대통령 양복과 구두를 비롯해 가죽점퍼, 스웨터 등을 더 이상 고쳐 사용하지 않고 40여년을 보관했다가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기증했다. 박 대통령의 검소한 생활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청와대 집무실의 에어컨을 틀지 않았고, 구두는 뒤창뿐만 아니라 앞창에도 고무판을 덧붙여 신었다.
이번 책은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에 대한 회고를 반반씩 할애했다. 김 전 비서관은 “육영수 여사는 노인에 대한 관심이 특히 많았어요. 제가 여사님을 모시고 노인회관(현재의 대한노인회)을 몇 번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고 기억했다. 서울 청파동에 위치한 대한노인회 건물도 육영수 여사가 마련해준 것이다. 육 여사는 1971년 노인회 뒤뜰에 기념식수를 하기도 했다. 그 옆에는 육 여사 사후에 세워진 ‘고육영수여사경로송덕비’가 있다. 송덕비는 육 여사가 노인에 대한 효와 노인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헌신한 공적을 기리고 있다.

▲ 1970년 초, 박정희·육영수 내외가 청와대 뜰에서 기념촬영했다.

“과잉 충성 하지 말아요”
한 번은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1932~2009)이 영문도 모른 채 육 여사로부터 주의를 받은 일이 있다. 경복궁 경회루에서 육영수 여사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양지회’ 주최로 경로잔치가 열렸다. 악단 연주소리와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가까운 청와대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경호실에서 경복궁 사무실로 연락이 오기를 각하 집무실에 노랫소리가 들리니 노래를 삼가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육 여사는 괜찮으니 그냥 계속하라고 지시했어요. 행사를 다 마치고 나서 나는 영부인을 모시고 청와대로 돌아왔어요. 현관에서 경호과장이 나와 인사를 하는 순간 영부인이 ‘거기서 연락했어요?’라고 물었어요. 과장이 어물어물하자 ‘집무실에서 뭐가 들린다고 그래요 ’라고 언짢게 말했습니다. 2층 비서실장실에서 내려오던 김성진 대변인과 마주친 영부인은 ‘그렇게 과잉 충성하지 말아요’ 라고 했어요. 영문을 모른 김 대변인은 얼굴이 벌건 채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청와대 비서관 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아카시아 꽃밥’이다. 어느 날, 경기도 성남에 사는 주부가 육 여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서울역 앞에서 행상을 하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다쳐 병원에 누워 있어 어린자식들과 80세가 넘은 시어머니 등 온가족이 굶어죽게 됐다며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 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힘들게 찾아갔다.
“마침 온가족이 저녁상을 받아놓고 밥을 먹고 있을 때였어요. 촛불 아래서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열심히 밥을 먹고 있었어요. 밥상 위 그릇에 수북한 흰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더라고요.”
김 전 비서관은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면서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을 안 하고 흰쌀밥이 웬일인가 해서다.
“한참 앉아 있으려니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둘 선명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건 쌀밥이 아니라 하얀 아카시아꽃이었어요.”
며칠 후 김 전 비서관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내외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말을 꺼냈다. 박 대통령 내외는 처연한 표정에 아무 말이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철두철미한 분
“박 대통령이 당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해요. 1960년대 초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해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만나 붙들고 눈물을 흘렸던 박 대통령은 귀국 길에서도 똑같은 결심을 하셨을 겁니다.”
대통령 내외가 아무리 신경을 써준다고 해도 최고 통치자를 근접해 모셔야 하는 비서관 생활은 고되고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 전 비서관은 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고 그저 즐겁고 보람되다는 생각뿐이었다”며 “단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지금껏 남아있다”고 했다.
그 일은 박 대통령이 낚시를 하러 나가면서 김 전 비서관을 데리고 가려 했을 때 당돌하게 거절한 일이다. 김 전 비서관은 “나 때문에 경호실과장과 경호원들이 문책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분들에게 너무 미안한 나머지 대통령에게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한 거지요. 대통령은 그 후 그 일에 대해 아무 말씀을 안 하셨어요.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그렇게 너그럽게 대해주셨던 겁니다”고 기억했다.
김 전 비서관은 박 대통령이 시해 당하던 10월 26일 밤 무엇을 했느냐고 묻자 “퇴근 후 집(잠실)에 있다가 평소 알고 지내던 대학교수로부터 청와대의 모든 전화가 불통이라는 연락을 받았다”며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어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청와대에서 온 차를 타고 출근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대통령이 안가에서 총에 맞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간첩이 저지른 짓으로 알았어요. 그때는 정보부장이 개인적으로 직원을 채용하던 시절이라 그 가운데에 간첩도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던 겁니다. 나중에 김재규가 그랬다는 말을 듣고 평소 김재규와 차지철이 사사건건 티격태격하다가 간경화를 앓던 김재규가 이판사판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판단했지요.”
김 전 비서관은 10·26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는 꾸준히 접촉해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은둔 시절을 제외하고는 제사 때마다 만나왔다고 한다. 1970년대 청와대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은 처신이 신중했다고 기억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 1973년 박근혜 대통령이 대학 4년 때 어머니를 대신해 하와이 이민 70년 주년 교민 행사에 참석하게 됐다. 육 여사는 현지 모임 7~8군데에 맞춰 입고나갈 한복을 정해주었다. 그런데 계획에 없던 행사가 하나 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밤에 국제전화를 걸어 어머니에게 어떤 한복을 입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국제전화 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아마 다른 사람 같았으면 대충 입었을 지도 모르지요. 정말 철두철미한 면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1989년 공직생활을 끝낸 김 전 비서관은 개인 사업을 잠시 했다. 분당에 거주하는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정과 존경심을 갖고 책의 개정판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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