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폭격기서 폭탄 한 발… 눈 앞 번쩍하더니 암흑과 동시에 화염 덮쳤다”
“미 폭격기서 폭탄 한 발… 눈 앞 번쩍하더니 암흑과 동시에 화염 덮쳤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8.01 11:31
  • 호수 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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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서 피폭된 곽귀훈 원폭피해자협회 명예회장

日 정부에 4년여 배상소송… 한국 피폭자 5천여명 건강수당 받아
매년 8월 일본 반핵대회 참가, 원폭 참상과 한국 피폭자 실태 알려

 

▲ 일본 오사카부에서 발부한 곽귀훈 명예회장의‘피폭자건강수첩’. 곽 회장은 오사카부를 상대로 피폭자자격확인소송을 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곽귀훈(90) 명예회장은 해마다 이맘때면 일본에 간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매년 8월 개최하는 ‘원수폭(原水爆)금지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곽 명예회장은 “대회 주관사로부터 경비 일체를 지원 받아 올해도 7박8일 일정으로 일본에 간다”며 “전 세계에서 온 반핵단체 회원들을 상대로 한국피폭자 실태와 원폭 참상에 대해 강연한다”고 말했다.
곽 명예회장은 69년 전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지만 90세인 현재까지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 7월 말, 성남시 분당에 있는 자택에서 만나 피폭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들었다.

-피폭 후유증은 없는가.
“보다시피 아무렇지도 않아요. 팔과 얼굴, 등에 남은 화상 흉터도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여요. 다행히 후유증도 없고요. 가슴과 다리에 ‘켈로이드’(흉터종)라는 게 생겼다가 없어지곤 해요. 나이 들면 생긴다고도 해요.”

-피폭 당시 어땠는가.
“1944년 전주사범대 5학년 때(당시 20세) 강제징병 돼 히로시마의 서부 제2부대에 배속 받아 간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어요. 1945년 8월6일 오전 8시 경, 군사도로를 닦는 작업을 하러 어깨에 삽을 둘러메고 걸어가다 맑은 하늘에 까마득하게 떠있는 비행기 한 대를 봤어요.”

곽 명예회장은 미국 폭격기 B29가 햇빛에 반사돼 반짝하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때 폭격기에서 까만 점 같은 물체가 떨어졌다. 흔히 폭격기 폭탄은 줄지어 떨어지지만 이번 것은 단 한 발이었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면서 순식간에 온천지가 암흑으로 뒤덮였다. 순간 얼굴과 팔에 뜨거운 걸 느꼈다.
“흙먼지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처음엔 소이탄이 떨어져 건물이 불에 탄 줄 알았어요. 흙먼지가 걷히면서 병사가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직격탄인가 해서 방공호로 피신했어요. 거기서 등에 불이 붙은 걸 알았지요. 옷을 벗어 불을 끄고 한참 후 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하마터면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가 소속된 제2부대는 폭심지로부터 750m 떨어져 있었다. 피폭 며칠 전 부대에서 2km 떨어진 공병부대로 차출 당해 작업 중이었던 것이다. 피폭량이 허용량의 6만배나 됐지만 신기하게도 멀쩡했다. 당시 같이 있었던 군인들 중 반은 살았고 반은 죽었다고 한다. 곽 명예회장은 인근의 일본육군병원으로 이송된 후 정신을 잃었다가 미군의 함포사격소리에 의식을 되찾았다.

-어떤 치료를 받았나.
“화상치료만 받았어요. 원자폭탄이나 방사능 같은 건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의료품 사정이 열악해 손바닥 만한 거즈를 일주일에 한 번씩 갈아붙여 상처에 구더기가 생기고 그랬을 정도에요. 혈액파괴를 막는 주사라고 있었지만 굉장히 아프다고 해 난 안 맞았어요. 하루에 5~6명이 죽어나갔어요. 입과 코, 귀에서 피가 나오고 머리카락이 뭉텅 빠지는 사람은 다음날 꼭 죽었어요.”

-그 후 건강진단도 안 받았나.
“그 시절에 무슨 건강검진이 있었나요. 몇 년 전부터 받았지만 백혈구 수, 적혈구 수 다 정상으로 나와요.”

-피폭자로서 살기가 어땠는가.
“피폭자는 꼭 한센병 환자 같아요. 화상으로 눈썹도 없고 얼굴피부가 오구라 붙어버렸으니까. 한국사회는 피폭자를 차별해요. 지난 70년간 자선단체들이 단 한 번도 원폭피해단체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건 정부 탓이기도 해요. 미국은 원폭 투하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해 쉬쉬해요. 한국정부는 미국 눈치 보느라 피폭자를 방치하고 무관심했어요. 한일협정 당시 일본 측과 배상 문제를 협의할 때 우리 측 대표가 피폭자 문제는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어요.”

-혹시 결혼하는데 지장은 없었나.
“난 피폭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어요. 1959년에 한국일보에 ‘나는 피폭자다’라는 글도 연재한 적이 있어요. 결혼하는데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고요.”

곽 명예회장은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고 같은 달 27일 퇴원해 9월 초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도 화상 치료만 했다. 고향인 전북 임실 오수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 40여년 교직생활을 해오다 1989년 동국대 부속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교장으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평화교육’을 하기도 했다. 교실마다 다니며 원폭의 피해와 반핵에 대해 가르쳤다. 곽 명예회장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직을 두 차례 역임했다.
곽 명예회장은 ‘피폭자들의 구세주’로 불린다. 2002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단독으로 낸 ‘피폭자자격확인소송’에서 승소해 원폭피해배상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국 거주 피폭자 2700명, 미국 거주자 1000명, 브라질 거주자 2000명 등 약 5000명이 혜택을 받았다.
곽 명예회장은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에게 지급되는 ‘건강수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본 후생성으로부터 매달 연간 의료보험료 개인부담분과 건강관리수당 등을 합쳐 약 35만원을 받고 있다.

-어떻게 소송하게 됐나.
“그때까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어떠한 피해배상소송에서도 이긴 적이 없었어요. 주변에서 무모한 짓이라고 말렸고요. ‘한국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의 이치바 준코 같은 이가 ‘비록 지더라도 운동이니까 해야 한다’고 해 소송을 시작했던 겁니다.”
곽 명예회장의 소송 전 또 하나의 획기적인 재판이 있었다. 피폭자 손진두 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낸 것이다. 일본에 밀항했다 체포된 손씨는 “나는 원폭피해자로서 원폭 병을 치료하기 위해 왔으니 치료할 수 있는 건강수첩을 교부해 달라”고 호소했다. 일본정부는 1957년부터 원자폭탄 피해자의 의료에 관한 법과 수당을 지급하는 법을 만들어 치료해주고 수당을 지급해왔다.
손씨는 일본 시민단체의 후원으로 1972년 후쿠오카지법에서 후쿠오카 지사를 상대로 ‘수첩소송’을 벌였다. 2년 후 후쿠오카 지법은 ‘원폭 피해자라면 국적이 다르거나 밀항해온 범법자라도 수첩을 교부해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손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첩이 뭔가.
“일본 후생성에서 내주는 원폭피해자 관리수첩이에요. 그게 있어야 건강진단과 치료, 수당지급을 받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은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판결 이후 한국의 피폭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건강수첩을 받으려고 하자 일본은 순순히 내주지를 않고 꼼수를 부렸다. 일본 후생성 공중위생국장이 ‘일본국을 벗어나면 무효’라는 ‘통달 402호’를 통첩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인 피폭자들은 수당을 받지 못했다.
곽 명예회장은 바로 ‘통달 402호’를 무력화하려고 소송을 낸 것이다. 1998년에 시작된 재판은 4년여의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그 동안 100여 차례 일본을 드나들었다. 소송비용은 일본의 반핵시민단체에서 대주었다.

-재판부를 어떻게 설득했나.
“3만여 쪽에 달하는 재판자료가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돼 있어요. 요지는 간단해요. 내가 재판장에게 말했어요. ‘나는 일본군에 징집돼 군에 복무하다가 피폭했다. 그런데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피폭자가 아니다. 재판을 하기 위해 정오에 간사이공항에 입국하면 피폭자의 자격이 생긴다. 재판이 끝나 오후에 출국하면 다시 피폭자가 아니다. 무슨 법이 아침과 낮, 그리고 저녁으로 변하는 가’하고요. 그 말에 재판장도 설득을 당한 거지요. 그 후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어요.”

-피고였던 일본정부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일본정부는 ‘원호법은 사회보장법이니까 거주 하지 않는 외국인이나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은 수당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어요.”

-그걸 뒤엎은 근간은.
“‘수첩소송’ 당시 최고재판소의 판결문이 도움이 됐어요. 원호법에 국적 조항이 없으니 외국인을 차별할 수 없고, 건강수첩의 효력이 없어지는 경우는 사망했을 때지 국외로 나간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외로 나갔다고 차별하는 것은 인권조항이 담긴 헌법 제14조에 위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지요.”

-현재 건강한 상태인데도 수당이 나오나.
“병이 생겼다고 해서 주는 게 아니라 관리 측면에서 주는 겁니다. 만약 암이 발생하면 그에 대한 치료비가 따로 나와요.”

-일본은 지금도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정한다.
“내가 있었던 히로시마의 군부대 주위에 위안부들이 많았어요. 일본인이 3분의 1, 한국인이 3분의 1, 중국인이 3분의 1이에요. 남태평양 군도에 배치된 일본군들이 일년에 한번씩 싱가포르에 집결해요. 그걸 풀기 위해서지요. 위안부들은 군대와 함께 이동했어요. 그건 군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걸 부정한다는 건 말이 안돼요.”

곽 명예회장은 5남매 중 장남이다. 남매들은 2살 터울로 모두 생존해 있다. 곽 명예회장은 부인과 사이에 4남매를 두었다. 자식들도 건강하게 지낸다.
곽 명예회장은 최근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피폭으로 인해 생긴 게 분명하다”며 “일본 후생성에서 암 치료비 150만원을 따로 지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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