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너와 조각, 빨래판으로 표현한 여성의 삶
버려진 너와 조각, 빨래판으로 표현한 여성의 삶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5.08 14:12
  • 호수 4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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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윤석남-심장’ 전
▲ 유기견의 모습을 그린 ‘1025:사랑과 사랑 없이’(2008).

불혹에 그림 시작… 36년 미술인생 망라한 50여점 전시
가족 위해 헌신한 어머니, 소외된 대상 등을 따뜻하게 그려

1979년 4월, 주부로 사는 것에 회의를 느낀 불혹의 한 여성이 남편의 한 달 월급을 털어 미술도구를 구입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여성이 제일 처음 소재로 삼은 것은 39살에 남편을 잃고 6남매를 키워낸 자신의 어머니였다. 고단한 삶을 사는 서민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작가는 점차 여성 너머 인간과 자연을 끌어안는 모성애를 표현하는 작가로 성장했다. 화가 윤석남의 이야기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라 불리는 윤석남(76)의 개인전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심장’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어머니를 그린 유화, 여성 역사인물 시리즈 등 36년간의 미술인생을, ‘어머니’, ‘자연’, ‘여성사’, ‘문학’ 등 네 가지 주제로 정리한 회고전 성격을 띠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50여점의 작품과 160여점의 드로잉이 전시된다.
성균관대 영문과를 중퇴한 윤석남은 출발은 늦었지만 한국 여성의 삶을 서정적이면서 호소력 있게 표현하며 여성주의 미술가로 우뚝 섰다.
첫 번째 섹션 ‘어머니’에서는 윤석남이 오랜 시간 파고들었던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는 서민 여성의 모습을 담은 회화 작품들, 버려진 나무와 빨래판 등을 활용해 만든 어머니 시리즈 등을 통해 가족을 위해 헌신해온 어머니의 삶을 표현했다.
이 섹션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은 ‘손이 열이라도’(1986)이다. 작품은 열 개의 손이 달린 어머니를 통해 가족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손이 모자라는 여성의 힘겨운 현실을 담고 있다. 길거리에서 행상을 하며 힘겹게 부양과 양육을 감당하던 서민 어머니를 강렬한 선으로 표현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다.
또 ‘어머니5 : 가족을 위하여’(1993)도 눈여겨볼만하다. 윤석남이 회화를 떠나 처음으로 선보인 설치 작품으로, 버려진 나무판자와 빨래판 등을 잘라내고 결합해 가족을 위해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익살맞으면서도 정감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낡은 빨래판을 어머니의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위한 삶을 포기한 채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에서는 모성애로 세계를 보듬는 작품을 선보인다. 여성주의 작품에 몰두하던 윤석남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동물과 식물 등 약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품을 선보인다. 유기견‧여성‧연꽃 등을 소재로 한 ‘999-빛의 파종’(1997), ‘1025:사랑과 사랑 없이’ (2008), ‘화이트 룸’(2011) 등의 설치 작품을 통해 만물을 대하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이중 ‘어시장 2’(2003)가 특히 눈길을 끈다. ‘어시장 2’는 한 여성이 머리에 큰 고래를 이고 팔을 길게 아래로 뻗어 물고기들을 몰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설치 작품이다. 한 쪽 팔로 거대한 고래를 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팔로는 물고기들이 갈 길을 제시해 주는 모습을 통해 여성애에서 모성애로 나아가는 윤석남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1025:사람과 사람 없이’는 유기견 1025마리를 표현한 작품인데 역시 소외되고 버려진 소수자와 약자를 껴안으려는 그녀의 모성애를 확인할 수 있다.
윤석남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표현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사라진 역사 속 여성들을 위로하는 작품도 만들어 왔다. ‘여성사’에서는 조선시대 기생 이매창과 거상 김만덕에게 헌사하는 작품 ‘종소리’(2002)와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2015) 등을 볼 수 있다.

▲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 2015년 작.

특히 대형설치 작품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는 관람객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김만덕의 심장을 ‘♡’모양이 아닌 ‘핑크빗 눈물’로 표현하고 그 주변에 작은 투명한 눈물을 달아 놓았다. 굶어 죽는 제주도민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했던 김만덕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모성애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의 마지막 섹션인 ‘문학’에서는 작업 초기부터 ‘인물’과 함께 ‘이야기’를 담고 싶어 한 윤석남의 문학성을 조명한다. 윤석남은 1999년~2003년에 제작한 드로잉 160여점과 2013년 제작한 ‘너와’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표출하곤 했다.
‘땅만 보고 걷는 그 사람 신발 벗어 안고 있다. 땅이 그리웠나’, ‘당신이 아무리 막으려해도 그것은 언젠가 밖으로 풀어져 나올 것이다’, ‘남루하니까 날개이다’ 등 드로잉 작품에 적힌 간결한 글은 윤석남의 통찰력을 알려준다. 그의 고민이 일상적이면서도 재미있게 표현돼 있어 공감과 흥미를 이끌어낸다.
또 윤석남은 버려진 ‘너와’(목재로 만든 지붕재료)의 옹이와 결을 살려 여성들을 그리고 ‘우연이 아닙니다. 필연입니다’, ‘연두색은 슬프다’, ‘나에게 운명을 말하지마’ 등 시(詩)를 연상케 하는 제목을 붙인 ‘너와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문학성을 드러냈다.
전시는 오는 6월 28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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