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판화가, 칠순에 유화로 바꾼 까닭은?
세계적 판화가, 칠순에 유화로 바꾼 까닭은?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5.05.08 14:13
  • 호수 46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황규백’ 전

30년간 파리‧뉴욕 등서 활동… 여러 국제 판화 비엔날레서 수상
동판에 직접 조각한 판화작품들 유명… 힘에 부쳐 붓 다시 들어

▲ 유화로 전향한 후 그린 ‘하늘 속 모자’(2014).

“1970년대 뉴욕에 입성해 새로운 것을 해 보려고 2년간 죽을 고생을 하면서 ‘메조틴트’(동판에 직접 새기는 판화 기법)를 완성했어요. 그런데 2000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30년을 잡았던 도구를 내려놓고 붓을 들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무척 힘이 들었지만 무작정 그리다 ‘이거다’ 싶었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판화가에서 화가로 변신한 황규백(83)의 60년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황규백: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판화 작품 70여 점과 유화 30여 점 등 총 1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대부분의 한국 현대 판화가들이 유학 후 국내에 들어와 활동한데 반해, 그는 30년간 해외에 거주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루브리아나 판화 비엔날레(1979, 1981), 브래드포드 판화 비엔날레(1974), 피렌체 판화 비엔날레(1974) 등 내로라하는 국제 판화제에서 수상했고,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포스터에 삽입된 작품을 제작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번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부분은 황규백이 1968년 프랑스로 이주한 후 파리에서 제작한 초기 판화작품으로 채워졌다.
황규백은 1954년부터 1967년까지 국내에서 ‘신조형파’와 ‘신상회’ 소속으로 여러 미술제에 참여했다. 하지만 서양미술에 대한 갈증을 느꼈던 그는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한 무대를 찾아 1968년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에 정착한 직후 황규백은 ‘아틀리에17’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숙명처럼 판화작업을 시작했다. ‘아틀리에17’은 세계적인 영국 판화가 ‘스탠리 윌리엄 헤이터’가 1927년 파리 캉파뉴-프르미에르 가(街) 17번지에 설립한 판화공방이다. 특히 이곳은 동판화의 독특한 기법을 개발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판화제작소 중의 하나이다. 이곳을 바탕으로 1960년대 초반 프랑스에서 판화가 대유행했고 전시 또한 활발히 이뤄졌다.
황규백이 당시 제작했던 작품들은 한국에서의 회화작업과 연장선상에 있는 추상화 경향의 연작들이다. 이때 제작된 판화는 ‘역사의 기원’(Origine de l’Histoire, 1968), ‘진화’(Évolution, 1969), ‘역사 문서’(Document de l’Histoire, 1970) 등이다. 이중 눈여겨볼 작품은 ‘진화’이다.
‘진화’는 동판 위에 고대 언어인 상형문자를 연상케 하는 문양을 새겨놓은 작품이다. 탑을 쌓듯 새겨놓은 문양이 마치 인류의 발전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작가가 뉴욕에 정착한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제작한 메조틴트 작품들을 선보인다.
파리에서 활동을 통해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황규백은 뉴욕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술 인생의 또다른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전통 판화의 일종이며, 가장 다루기 힘든 메조틴트 기법을 독학으로 습득했다. 메조틴트는 동판에 세밀하게 흠집을 내거나 갈아 제작하는 기법인데 동판화 기법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부식액을 쓰는 다른 동판화와 달리 판을 일일이 긁어내야 하고 물감을 바른 후 닦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려 체력적인 부담도 크다.
전통적인 메조틴트 작품이 화면 전체의 배경색이 검정색인 것에 반해 황규백은 독특한 회색 톤으로 메조틴트 작품을 만들며 주목을 받았다. 이 무렵 황규백은 작품 구상을 위해 뉴욕 근교 베어 마운틴의 잔디밭을 즐겨 찾곤 했다. 우연히 그의 눈 속에 하늘‧잔디‧손수건이 들어왔고 그는 이 이미지를 토대로 기념비적인 메조틴트 작품 ‘잔디 위의 흰 손수건’(White Handkerchief on the Grass, 1973)을 제작했다. 작품은 잔디밭 위에 흰 손수건을 펼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하얀 손수건이 구름 잔뜩 낀 하늘을 가리는 장막처럼 걸려 있는데 손수건을 걷어내면 미지에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각종 국제판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메조틴트에 열중하는 계기가 됐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황규백이 2000년 영구 귀국 후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그린 회화작품들을 소개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육체적인 한계로 인해 판화작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그라들지 않는 예술혼 때문에 70세가 넘어 다시 붓을 들었다.
전시장에서는 그의 10여년간 노력의 결정체를 만날 수 있다. 황규백은 완숙한 붓질로 메조틴트 작품의 느낌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최근작 ‘하늘 속 모자’(Hat in the Sky, 2014), ‘시계’(Watch, 2014), ‘마네킹과 우산’(Mannequin with an Umbrella, 2015)은 그의 메조틴트 판화처럼 파스텔이나 색연필로 그린 것 같은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전시는 7월 5일까지 진행된다. 관람료 2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