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대명사였던 광해군, 명나라‧후금 사이 탁월한 중립외교로 재평가
폭군의 대명사였던 광해군, 명나라‧후금 사이 탁월한 중립외교로 재평가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1.20 14:02
  • 호수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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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둘러싼 논쟁들 <2> 광해, 폭군인가 외교천재인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면서 동시에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재해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반도 반만년 역사에서 일어난 갖가지 사건과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을 보는 관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치열한 논쟁을 통해 통설이 만들어지고 이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본지는 여전히 팽팽한 여러 한국사 논쟁들과 쟁점을 시리즈로 살펴보고자 한다.


미‧중‧일 등 강대국의 갈등이 거센 폭풍으로 바뀌어 한반도를 향해 몰아치고 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위안부 문제로 촉발된 긴장감은 한국에 거대한 압박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으로 외교부가 적절한 대응을 못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조선의 15대 임금(재위 1608~1623) ‘광해군’ 이야기다.
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광해군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임금은 없다. 한편에서는 쫓겨난 폭군이라 하고, 다른 편에서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중립 외교를 펼친 현실적인 군주로 높이 평가된다. 연산군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꼽혔지만 1980년대 들면서부터 그가 보여준 서민정책과 외교정책이 부각되면서 ‘개혁군주’로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역사학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에 대해 최근 학계에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펼친 중립외교 등을 들어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사진은 폭군 ‘광해’와 똑닮은 ‘하선’이란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광해의 양면성을 보여주며 흥행에 성공한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임진왜란 때 도망만 다니던 ‘선조’ 대신해 관군‧의병 진두지휘 호평
‘대동법’ 시행으로 조세혁명… 특산물 공납 폐지해 서민 고통 덜어줘
영창대군 죽음, 인목대비 폐위 등 악행에 관여… 끝내 폐위된 비운의 왕

광해군을 이해하기 위해선 조선왕실의 ‘서자’(庶子) 콤플렉스를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주자학(朱子學)의 귀천의식 및 계급사상이 지배계급의 정통사상이 된 까닭에 첩의 자식인 서자에게는 관직 진출의 제한을 두는 등 차별이 심했다. 이는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의 부친인 선조 역시 서자출신으로 재위 내내 고통을 받았다.
영창대군(1606~1614)이 태어나기 전까지 적자가 없었던 선조는 궁여지책으로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한다. 비록 차선이었지만 결과는 최선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 발생 후 도망갈 궁리만 하며 무능한 지도자의 끝을 보여준 선조와 달리 광해군은 분조(전시에 왕실을 나눠 나라를 운영하는 체제)활동을 펼치며 의병을 응원하고 장려하며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조선이 당시 명줄이었던 호남을 지킬 수 있던 데는 이순신‧권율로 대표되는 관군과 김천일 등의 의병들이 양동작전을 펼치면서 가능했는데 이 조직의 꼭대기에 광해군이 있었다.

광해군의 활약 명나라도 인정
이런 광해군의 대활약에 명나라도 감탄했다. 도망자 ‘선조’에 질려버린 명나라 황제는 조선에 칙서를 내려 “광해군에게 전라 경상도의 군사 총독을 맡겨라” “부왕의 실정을 만회해 종사를 보존토록 해라”고 응원했다. 종주국 역할을 하던 명나라가 선조보다 광해군을 실질적인 왕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광해군은 자칫 폐세자가 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갑작스레 선조가 승하하면서 광해군은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다. 전쟁터를 몸소 다니며 민중들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 그는 파격적인 친서민적인 정책을 내놓으며 성군의 자질을 보여준다.
광해군의 대표적인 업적은 ‘조세혁명’이라 불리는 대동법의 시행이다. 대동법은 지방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던 공납제를 폐지하고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한 납세제도를 말한다. 당시 생산되지도 않는 특산품을 세금으로 내야 했던 서민들의 처지를 악용해 세금을 대신 내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방납(防納)으로 인한 폐단이 심했다. 또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똑같은 비중으로 내면서 상대적으로 서민들의 고통이 심했다.

서민들 세금 최대 80% 줄어 들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대동제는 가지고 있는 토지에 비례해 쌀을 납부하면 돼 서민들의 경우 최대 80%까지 세금 부담이 줄었다. 당시로는 엄청난 개혁이었다. 이는 양반사회에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고 전국적으로 시행되기까지는 100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양전사업과 호구조사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으로 농토의 3분의 1이 줄자 광해군은 폐허와 토지 개간으로 농토를 늘리는 양전사업을 크게 벌였다. 호구조사 역시 마찬가지다. 비정상적인 호구(戶口)를 악용해 농민을 노비화 하거나 사유화하는 양반의 횡포를 막을 수 있었다. 두 사업은 국가 수입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실행했지만 서민들에게도 유리한 정책이었다.
역사학계에서 광해군을 평가할 때 가장 높은 점수를 주는 대목은 중립외교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국가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조선의 사대국인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파병으로 재정이나 군사력부분에서 많은 손실을 보았다. 그 결과 사방에서 지방 세력이 일어나고 변방에서는 야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특히 건주위 여진을 중심으로 한 여진족의 동향은 종전과는 달랐다. 즉 서서히 명나라는 기울어져 갔으며, 반면 여진족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전개되던 대외관계 속에서 광해군은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한편 무기 제조 등으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다. 광해군은 멸망하는 용의 꼬리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성장하는 뱀의 머리를 잡을 것인가 고민하다 철저하게 실리를 선택한다.
마침 1618년 명과 후금의 명청전쟁(1618~1662)이 반발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조선으로서는 앞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서둘러서 파병해야만 했다. 당시 대부분 조정 신료들은 명나라의 요청에 신속하게 응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광해군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시세를 관망했다. 끝내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파병 군사의 대장이었던 강홍립에게 비밀 교지를 내려 후금과 대적하지 말고 시세를 보아 판단하라 지시한다. 전장에 도착한 뒤 치러진 심하 전투에서 대패하자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대로 오랑캐 진영과 협상을 하고 “후금과의 싸움은 조선의 뜻이 아니며 왕의 뜻을 받아 항복한다”고 말하며 곧바로 투항했다. 후금 역시 이에 화답해 조선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밝히며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후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더욱 탄력을 받는다. 후금과의 마찰은 인조반정 전까지 없었다. 후금 역시 조선을 상당히 후하게 대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과 후금과의 밀월관계는 후금에게 병자호란을 일으키는 명분을 주기도 했다. 후금은 침략 이유로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양날의 검’이었던 그의 중립외교는 결국 그가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신하들은 그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점과 어머니의 위치에 있던 인목대비를 폐위한 점, 그리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명분’을 들어 그를 끌어내리고 인조를 추대했다.
조선왕조실록엔 광해군이 형인 임해군이나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데 매우 주저했다고 기록돼 있다. 끝까지 이를 윤허하지 않았던 것.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인 대북파 신료들의 계속된 요구도 묵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임해군은 유배지에서 사사됐고 영창대군은 끓어오르는 방안에서 죽었다. 인목대비는 유폐됐다. 직간접적으로 광해군이 연관된 것이다.

궁궐 재건 등 토목사업도 반발 불러
가족간 골육상쟁은 명분을 줬지만 대규모 궁궐 중건, 재건 사업은 현실적인 이유가 됐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궁궐들을 재건했다. 창경궁을 비롯해 4개의 궁궐을 다시 지었다. 하지만 단기간 내에 너무 많은 토목공사를 진행하면서 부작용도 컸다. 궁궐공사는 국가적인 대사업인데 동시에 4개씩이나 진행해 부역에 동원함으로써 민심이 이탈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대규모 건설사업을 벌여 국가 경제 활동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건설사업에 필요한 물품들의 거래가 늘어나고 이를 통한 상공업이 흥했다고 분석한다. 또 당시 한양엔 전쟁으로 집을 잃은 백성들이 모여들었고 광해군이 공사를 통해 이들에게 먹거리를 보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국가재정의 10~15%에 달하는 돈을 퍼부은 점은 장점보단 단점이 더 많았다. 또 향후 이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벼슬을 파는 일이 벌어지고 공사대금을 빼돌리는 벼슬아치가 생기는 등 병폐도 심했다.
그가 명군이었는지 아니면 폭군이었는지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죽음이 조선의 역사를 바꿨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폐되었다가 제주도로 이배되어 생을 마감했고 대세를 못 읽고 광해와 반대 노선을 타 ‘친명배금’ 정책을 펼친 조선은 후금에 의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또 한 번 위기를 겪게 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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