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39]역사가의 중요한 원칙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39]역사가의 중요한 원칙
  • 한 문 희 한국고전번역원 출판콘텐츠실장
  • 승인 2018.01.05 10:48
  • 호수 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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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의 중요한 원칙 

역사가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계통을 밝히고, 찬역을 엄히 하고,

시비를 바로잡고, 충절을 포양하고, 전장을 자세히 하는 것이다.

史家大法(사가대법), 明統系也(명통계야), 嚴簒逆也(엄찬역야), 

正是非也(정시비야), 褒忠節也(포충절야), 詳典章也(상전장야).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동사강목(東史綱目)』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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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順庵) 안정복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순암은 고려 말까지 우리 역사를 강목체로 정리한 『동사강목』을 저술한 데 이어, 조선 초부터 영조 때까지를 담은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지어, 우리 역사의 체계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순암은 역사가의 제일의 임무로 계통을 명확히 세울 것, 찬역, 충절, 시비를 똑바로 가릴 것, 또 제도, 문물을 상세히 기록할 것 등을 주장했는데, 특히 그 과정에서 ‘고증’을 중시하여 과거의 역사 기록을 단순히 취사하여 조술(祖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때문에 ‘순암 사학’을 근대 사학으로의 발전 과정에서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순암이 지은 『동사강목』에는 역사가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원칙과 관련하여, 한 역사 인물의 평가가 눈에 띈다. 바로 백제의 계백(階伯) 장군에 대한 평가다. 글은 이렇다.

슬프다! 계백의 황산 싸움을 볼 것 같으면, 위급할 때 명을 받고서 5000명의 보잘 것 없는 군사를 이끌고 10만 명의 강한 적을 앞에 두었는데도, 거조에 조금도 혼란됨이 없었고 의기(意氣) 또한 편안하였다. 험지에 의거해서 진영을 설치한 것은 지(智)요, 싸움에 임해서 무리에게 맹세한 것은 신(信)이며, 네 번 싸워 이긴 것은 용(勇)이요, 관창(官昌)을 잡았다가도 죽이지 않은 것은 인(仁)이며, 두 번째 잡았을 때 죽여서 그 시체를 돌려보낸 것은 의(義)요, 중과부적해서 마침내 한번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충(忠)이다. 삼국 때에 충신과 의사가 필시 많았지만, 역사서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마땅히 계백을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양촌(陽村)은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인데도 그 말이 이러하였으니, 후인들이 정말로 그런 것이라고 믿지나 않을까 하는 까닭에 변론해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번역문만 게재)

이 글에서 언급한 ‘양촌’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학자로 유명한 권근(權近, 1352~1409)을 말한다. 순암이 비판한 글은 양촌이 초절(抄節)한 『동국사략(東國史略)』해당조에 실려 있다. 

계백이 명을 받고 장군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게 되자 출발할 즈음에 먼저 그의 처자를 죽였으니 도리에 벗어남이 심하다. 비록 국난에 반드시 죽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힘껏 싸워 이길 계책은 없었던 것이니 이는 먼저 사기를 잃고 패배를 부르는 일이었다. (중략) 계백의 난폭하고 잔인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싸우지 않고 스스로 굴복한 것이다. (번역문 게재)

『양촌집』을 보면 인륜의 도리를 밝혀 시속(時俗)을 비판한 글이 많기 때문에 공감하는 바가 많지만, 계백에 대한 이런 평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백제의 마지막에 나라의 버팀목이 되었던 계백! 그에 대한 온당한 역사가의 평가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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