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인을 찾아서] 김판술 전 국회의원
[100세인을 찾아서] 김판술 전 국회의원
  • 관리자
  • 승인 2008.05.3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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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종아리 만져봐 아직도 딴딴해"

김판술 전 의원의 전화 음성은 우렁찼다. 가랑가랑하는, 힘없는 목소리일 것이라 지레 짐작한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자택에서 만난 김판술 전의원은 기자를 두 번 놀라게 했다. 많이 보아야 70대의 어르신이 문을 열어 기자를 맞이했는데, 김판술 전의원의 아들쯤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우렁찬 목소리와 깨끗한 용모의 노신사는 바로 올해 백수(白壽)를 맞이한 김판술 전의원 본인이었다. 귀가 약간 어둡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신체기능이 정정했다. 눈빛, 걸음걸이, 언변등 모두 뛰어났다. 젊은 사람도 지칠법한 두시간여의 인터뷰 내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 인터뷰에 응하는 김 전의원의 모습을 바라보자니, 김 전의원을 100세인을 취재하는 첫 케이스로 선정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O 백수(白壽)를 사셨다고 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 활동적이고 정력적이십니다. 남다른 건강 관리법이 있으신지요 


남다르게 뭘 하는 것은 없어. 다만 좀 남다르게 태어났지. 어머니가 나를 수태할 때 멧돼지한테 물리는 꿈을 꾸었거든. 그런데, 이 멧돼지란 놈이 산을 좋아한단 말이야. 산만 보면 뛰어올라가는 게 멧돼지거든. 그래서 그런지 내가 산을 좋아해. 기회만 닿으면 산으로 올라갔지. 국내의 산은 말할 것도 없고 안데스, 로키, 히말라야 등 안 가본 데가 없어. 지금도 뒷산은 늘 올라가. 내 종아리를 만져보면 알겠지만 아직도 딴딴해.

 

대학 때는 야구선수를 했지. 눈이 좋아서 항상 4번 타자였어. 일본에서는 야구선수가 여자들에게 인기야. 시합이 끝나면 저녁에는 이불 속까지 뛰어 들어올 정도지. 담배는 안 해도 술은 잘 마셨어. 정종 두되는 한 번에 마실 정도였으니까. 대신 한 번 실컷 먹으면 며칠씩 쉬곤 했지. 아버지는 나보다 더했고. 아버지는 말로 드신 분이었으니까.

 

O 운동선수에, 호주가셨으면 따르는 여자도 많으셨겠습니다.


그렇진 않아, 난 여색을 즐기진 않았어. 어찌 보면 약간 금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게 지금까지 산 비결이라면 비결인지도 모르지. 아내가 20살에 시집와서 6년 전에 92세로 먼저 갔는데, 한 20년 넘게 많이 아팠어. (아내의 사진을 보여주는 김 전의원의 눈길에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O 특별히 즐기는 음식이 있으시거나, 생활습관이 있으신지요 


화려한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떡국, 설렁탕, 바지락칼국수 같은 대중적인게 좋아. 지금은 우리 딸애랑 같이 요 앞 식당에서 바지락 칼국수를 자주 먹는데, 이 바지락이란게 참 좋아. 내가 고등농림을 전공했잖아. 영양에 대해 좀 알지. 이 바지락에 들어있는 단백질이 사람한테 참 좋거든. 그리고 특별히 습관이랄 것은 없어. 산만 보면 올라가고 싶은 거 빼고는. 그리고 한가지 꼽자면 자기 전에 항상 역사책을 읽고 자곤 했지. 역사를 참 좋아했거든.

 

O 격동의 세월을 살아오신 만큼 스트레스도 남달랐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스트레스대처법이 있으신지요 


내가 원래 화를 잘 안 받는 성격이야.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차분하게 생각해서 급하게 싸우거나 화를 내진 않지. 그리고 뭘 움켜 쥐고 특별히 집착하지 않아. 모든 것은 가진 걸 지키려는 데서 아등바등하고, 싸우게 되는데 나는 뭐가 생기면 그때그때 나누어 줘 버리고 말았어. 그러니 특별히 싸울 일이 없는 거지. 지금 있는 이 집도 내 집이 아니라 딸네 집이야.

 

난 지금 가진 것 한 푼 없이 얹혀살고 있는 거고. 선친한테 물려받은 땅이며 재산은 다 학교에 줘버렸어. 군산상고, 군산공고 세울 때 선친한테 물려받은 땅이며 창고며 집이며 전부 정부고시가격으로 줘버렸어. 정부 고시가격이란게 시세의 10%도 안 되는 거거든. 나중에 군산시에서 뭐 나를 군산의 인물이라고 해서 공원이며 동상이며 만든다고 자료를 달라고 하는데, 필요 없다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해 버렸지.

 

보사부 장관 할 때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병원에서 며칠 모시다가 가망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집으로 모셔서 임종을 맞으시게 했지. 그때 어머니 염을 내가 스스로 했어. 차분하게 가셨고, 나도 차분하게 보내드렸어.

 

O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의 어려운 시기를 관통해 살아오셨는데요, 특별히 기억나시는 일이 있으신지요 


내가 교토제국대학에서 성적이 우수했어. 그래서 만주제국대학 연구관으로 4년을 근무했지.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향에서 정착했는데, 나를 동회장을 시킨거야. 동회장 업무라는게 공출, 징용업무를 해야 하는 일이거든. 그러니 그걸 위에서 시키는대로 안하겠다고 버티는 나와 관청 사이에 매일같이 승강이가 있었지.

 

선친한테 물려받은 800석 정도의 논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 공출을 대납하기도 하고, 어려운 마을 주민들한테 술이며 밥도 많이 냈어. 그래서 그런지 해방이 되자 다른 동회장들은 다 맞아 죽었는데, 난 오히려 주민들한테 구두까지 선물 받은 유일한 동회장이었어.

 

나중에 군산에서 선거할 때는 돈이 없어서 막걸리 한사발 돌리지도 못했지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선거운동 해 줘서 당선도 되었지. 해방 이후에는 군산에서 남산신문사를 운영했는데, 대중 문화를 잘 다루고 해서 인기가 좋았어. 전북, 전남은 물론 경남까지 신문이 널리 보급됐었으니까. 특히 사설이 좋아서 미군 군정관이 번역시켜서 읽을 정도였었지.

 

이게 또 나를 한번 더 살린거라.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 선생이 나를 좋아해서 군산 청년회장을 시켰는데, 신문내용이랑 얽혀서 좌익으로 몰려 유치장에 수감됐었지. 그 때 전북 군정관이 찾아와서 김판술이 당장 석방시키라고 하는 바람에 풀려났지.

 

O 의정활동 중에 기억나시는 일은 어떤 것이 있으십니까 


내가 민주당 신익희, 장면, 조병옥 박사들한테 총애를 받았어. 할 말 하고 살았지. 내가 소신 있게 행동했다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야. 하나는 농지개혁이 잘못됐다고 지적한 거야. 지주들한테 땅을 사서 소작들한테 판다고 농지개혁을 했는데, 이게 살 수 있는 소작농들이 거의 없었거든.

 

그리고 하나는 정말 가슴 아픈 일인데, 6.25때 낙동강까지 밀리니까 다급해서 학도병을 모집했거든. 그들이 군복도 없고, 총 하나도 들지 못하고 전선에 나가서 몸으로 총알받이하면서 시간을 지연시킨 덕에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B-29 발진하여 폭격이 가능했고 전쟁이 전환된 거거든. 그런데 나중에 보상 예산 심의 하는데, 예산이 부족하다고 이들을 무슨 도망병이나 포로로 취급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지.

 

국회에 장성들이 좍 앉아 있는데, 당신들 다 별 떼라고 호통 쳤지. 학도병들 없었으면 당신들도 다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다고. 자유당이 붕괴하면서 민주당 의원들한테 야당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다녔지. 정치란 여야가 서로 견제하면서 나가야 하는 것인데, 자유당이 없어지고 민주당이 여당 되니까 야당이 없어진거라, 결국은 민주당에서 신구파 싸움으로 번져서 우왕좌왕하다가 쿠데타를 불러온거 아냐.

 

O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영위하고 싶으십니까 


난 이제 잘 살아야 한 10년 살지 않을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돌보면서 살고 싶어. 가진 게 없으니 뭐 마음으로 해야겠지만. 나이 먹으면서 김해김씨 중앙 종친회 일을 열심히 거들었어. 지금은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재랑 같이 종친회 고문으로 있어. 죽을 때까지 종친회 일은 챙겨 봐야겠지. 뭐 좀 같이 해달라고 하는 데가 많은데, 이젠 뭐 나서서 하기 싫어 나가질 않아. 조용히 있다가 가면 되는 거지.

 

O 전국의 노년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못난 놈이 오래 산 것만도 고마운데 할 말이 뭐가 있겠나. 다만 욕심없이 살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 꾸준하게 하는게 중요한거지. 이 나이쯤 되면 뭘 가지려거나 명예를 얻고자 하는 거나 다 부질없다는 거 다 알게 될테니까.

 


함문식 기자 hammoonsik@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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