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길 영우통산 회장
양대길 영우통산 회장
  • 관리자
  • 승인 2006.08.2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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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터 생산 오직 한길 ‘수출탑’에 보람…

섬유수출 전성기의 한 중심에서 오직 스웨터 한 분야에 매진하여 ‘5000만 불 이상 수출 탑’을 수상하는 등 혁혁한 수출 공로를 세우고, 1990년대의 중남미 진출, 이북 5도민회 활동, ‘영우통산’ 재창업 등 최근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며 ‘일하는 노년’ ‘아름다운 노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수출회사 영우통상을 이끌었던 양대길 영우통산(주) 회장을 만났다.


 

양대길 영우통산 회장은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한 기업인’이었다. 송파구 잠실, 영우통산 회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느낌이 역력했다.

 

군인으로 치면 산전수전 겪으며 승승장구했던 노 장군의 방에 들어선 듯했다.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했던 때, ‘5000만 달러 이상 수출의 탑’을 수상하는 등 경제인으로서의 활약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수출 기업인으로서 최고 영광인 ‘수출탑’을 수상하고 받은 빛바랜 상장 액자, 상패, 트로피 등의 조형물, 상패, 훈장증 액자, 전직 대통령들과 청와대에서 찍은 사진들….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을 한 눈부신 증거들이다.


그런데 이런 양 회장에 대해 언론에 알려진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 경제인 저변이 그만큼 넓다는 의미이면서, 이름을 안 알리고 양 회장처럼 뛴 수많은 영웅들이 있어서 세계 10위권 교역국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양 회장을 만나는 의미가 그래서 각별하다.

 

삼성 대우와 경쟁한 수출회사 영우통상 창업주


양대길 회장은 이른바 ‘3저 현상’ 호황기의 한 중심에 있었다. 1985년 스웨터 단일품목으로 수출 5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하기 시작하여 1989년까지 많을 때는 9750만 달러 수출실적을 달성했을 정도로 엄청난 수출 실적을 거두었다.

 

“스웨터 한 타당 10달러 내외였으니 5000만 달러어치면 그 양이 남산의 몇 분의 1정도는 됐을 거예요”라며 양 회장은 웃었다.


하청공장, 부자재 납품 협력업체까지 합치면 100여 개 업체, 수천 명이 양 회장의 영우통상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때가 있었다. 수출실적 면에서 준 재벌급에 속하는 중견 기업이었으나 이른바 문어발식 사업 확장은 지양했다.

 

영우통상도 무리했다면 후발 재벌급 기업으로 발돋움했을지 모르지만 양 회장은 한 우물만 판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부실을 안고서라도 기업을 확장하는 것이 유행일 때 내실을 다진 이런 기업인들이 한쪽에 존재하고 있어서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탱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수출을 하기 위해서 외국 바이어들에게 기생접대를 한다 어쩐다 말이 많았는데, ‘3저 호황’ 때는 거꾸로 됐어요” 주수출국인 미국 정부가 스웨터를 반덤핑으로 제소하여 수출 물량이 강제 축소되었던 때의 이야기다.


영우통상은 1980년대 후반, 급속히 이루어진 임금인상과 미국의 반덤핑 등으로 수출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사세가 위축되었다. 이때 생산 공장을 중남미 도미니카로 이전하여 한때 1200명 정도의 직원을 거느리며 뉴욕 시장에 직접 진출하기도 했다.

 

리어카를 끌어도 내 사업이 최고


양 회장은 평북 강계 출신이다. 남남북녀, 북녀 중에서도 손꼽힌다는 강계미인…. 이렇게 운위되는 강계에서 지주 집 아들로 태어났다. 인공치하가 된 북한에 있다가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와 장교로 입대하여 중위로 제대했다.


제대 후 무엇을 할까 알아보던 중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사업을 선택했다. 지게를 져도 내 사업을 하는 것이 낫다는 조언을 받아들인 것. 그러다 가발, 보세가공수출이 한창이던 1965년에 수출용 스웨터 공장을 차리게 됐다.

 

마침 아는 사람이 일본에서 스웨터 전문 기술자를 데려올 수 있어서 서울 정릉에 부지를 마련하여 공장을 지었던 것. 밭뿐이던 곳에 스웨터 공장을 짓고, 직원들이 이주하면서 그 일대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양 회장은 바로 그렇게 마을이 형성된 정릉동에서 재작년까지 살았다.


스웨터 공장을 차린 지 처음 3년여 동안은 공장 마루 바닥에서 자면서 국수를 끓여먹으며 생활했다는 양 회장은, 그렇게 한 5년 정도 매진하자 생산량 면에서 당시 하청을 주던 ‘한국모방’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

 

시설과 인원은 3분의 1이었으나 생산량 면에서 한국모방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섭게 회사를 키우며 무역회사 영우통상을 설립하여 중견 수출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성공 비결은 직원 스스로 일할 수 있도록 근로의욕을 고취시킨 것. 일정한 기본급에 성과급을 가미한 임금체제도 도움이 됐다.

 

유능한 직원들이 많이 몰리는 회사로 유명하기도 했고, 영우통상 시절에는 밤 12시가 되면 강제로 전원스위치를 내려야 했을 정도로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기도 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았던 때였고, 직원들이 고마웠다고도 말했다. “영우회라고 지금도 그때 직원들이 만나고 있습니다”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수출이 5천만 달러 이상으로 올라간 성공 비결은 과감한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투자였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할 때, 바이어가 요청한 어려운 공정의 스웨터를 생산하기 위해 거액의 기계를 들여놓았다. 그것이 한 때 9700만 달러어치의 수출 실적을 올리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런 여력으로 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하여 계열사화한 적도 있었다. 지금의 삼성상호신용금고의 전신으로, 인수 당시 업계에서 존재도 없던 것을 양 회장이 인수하여, 직원 일인당 실적 면에서 5손가락 안에 꼽히는 업체로 키워냈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본의 경우를 들어 신용금고가 장차 사양화될 것이라고 하자 결단을 하여 매각했다.

 

50년 넘게 한 아침운동 ‘걷기’


경제성장률을 놓고 4.5%냐, 5%냐 갑론을박을 하는 2006년. 고도경제성장기의 수출기업을 이끌었던 양대길 회장은 지금의 경제 여건을 몇 가지 면에서 우려했는데, 그중에서 소득의 하향평준화 현상에 대한 우려가 컸다.

 

즉 고도 성장기를 지내온 기업인들이 대개 그렇듯이 분배를 중시하는 정책이 자칫 근로의욕과 생산성 저하로 이어져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지 않느냐는 관점이다. 이것은 물론 양 회장이 수출기업을 경영하던 때의 성공 비결과도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다.


최근의 건강과 사회활동에 대해 물어보았다. 1956년 군대에서 제대하고부터 50여년을 거의 거르지 않고 아침에 걷는 운동을 한다고 한다. 걷는다고 해도 남산과 정릉 등 거의 등산 수준이다. 이제는 힘든 등산은 전같이 못하지만 역시 걷는 것이 건강에는 최고라고 했다. 헬스클럽에서 운동도 하고 골프도 즐긴다.


하루 일과는 현역시절 못지않게 여전히 빡빡하다.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는 컴퓨터도 한다. 정보를 찾고, 메일을 확인하는 것. 친구를 만나고, 운동을 하고, 인간개발원에 나가 강의를 듣는 등 좋은 생각 좋은 기분이 드는 일들을 찾아 하는 것은 기본 일과다.

 

회사의 일은 자잘한 업무는 손을 놓고 큰 줄기만 신경 쓴다. 두 아들이 운영하는 각각의 회사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맘에 안 드는 것이 있고 개입을 하게 되는데, “내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에요”라며 원로로서의 자리에 있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번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견본품을 사왔다 하여 보라고 해서 봤는데, 영 못 쓸것만 사왔어요” 양 회장이 싫은 내색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3달도 안 되어서 그것들이 다 팔렸다는 것이었다. 현실에 적응하고 CEO의 말을 인정하는 면이 역시 연륜 있는 노 기업가다웠다.


2북 5도민회 활동으로는 최근 평안북도민회 고문을 맡고 있다고 했다. 아이엠에프 때 이북5도민들이 설립한 동화은행이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안응모 회장과 함께 회생시키기 위해 애를 쓴 것을 비롯하여 평북도민회장으로 재임할 때는 통일전망대, 경모공원, 도민회 운영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흑자로 전환시켜 놓기도 했다.


통일에 대해 물었더니 금세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다 세상 떠나고 형님 아이들 둘과 내 누이동생 하나만 남았어요”라고 하며 말끝을 흐린다. 이산가족 상봉을 아직 안했냐고 묻자, 지주 출신으로 월남한 자신으로 인해 조카와 누이 등 인척들이 혹여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았다고 했다.

 

게다가 이북 5도민 활동도 했으니 달갑지 않게 여길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양 회장은 “살아 있는 동안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산전수전 겪은 노 기업가이지만 가족과 고향 이야기에는 감정이 복받치는 모양이었다. 

 

박병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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