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동안거(冬安居)와 행복
[백세시대 / 세상읽기] 동안거(冬安居)와 행복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11.22 14:33
  • 호수 69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존경과 대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님들이 비닐하우스에서의 석 달간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갔다. 지난 11월 11일, 경기도 하남시 위례신도시 내에 있는 종교부지. 자승 전 총무원장을 비롯한 무연·성곡·진각·호산·심우·재현·도림·인산 등 총 9명의 승려들이 검은 천으로 덮인 비닐하우스 천막 법당인 상월선원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자물쇠가 채워졌다. 안에는 화장실이 하나 있고 음식은 작은 창을 통해 들어간다.

음력 10월 보름에서 정월 보름까지 외부와의 출입을 끊고 참선 수행하는 동안거 기간에는 하루 14시간 정진, 공양은 하루 한 끼, 옷은 한 벌만 허용한다. 양치만 가능하고 삭발과 목욕은 금한다. 그리고 문밖을 나올 때까지 묵언이다. 이를 어길 시 조계종 승적에서 제외한다는 각서와 제적원을 제출했다.

스님들이 비닐하우스 안에 설치한 일인용 천막에서 무얼 할까. 묵언수행이다. 이는 명상과 일치한다. 불교는 원래 종교라기보다는 명상주의다. 인도의 한 왕자는 왕궁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명상을 통해 완벽하게 행복한 자 붓다가 된다. 그리고 이 행복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이것이 불교다. 때문에 모든 불교는 그 핵심에 명상이 있다.

동아시아의 선불교는 명칭부터가 선(禪), 즉 명상 불교다. 이런 점에서 선불교는 붓다의 정신을 가장 오롯하게 계승하고 있다. 오늘날 선불교의 대변자는 조계종이다. 때문에 조계종 승려들은 현대에도 겨울 집중 수행을 위해 2000여명 이상이 동안거에 들어간다. 자기로부터의 투쟁과 혁명에 나서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립되고 고독을 느낀다. 요즘 서초동과 광화문 광장에서 쏟아지는 양극단의 외침은 개인적, 사회적 자아가 실현되지 않음으로 인해 터져 나온 불만과 질책이다.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개인들이 저마다 구축해온 이념과 양심, 철학이 만들어낸 정의들로 인해 터지기 직전의 고무풍선처럼 한껏 팽창돼 있다.   

인간은 개인적, 사회적 자아가 실현되지 못하면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도 한낱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나. 방법 중 하나가 명상이다. 명상은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걸 기도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참선이라 하기도 한다. 명칭이야 어떻든 간에 스스로의 내면과 세계와의 조화로운 질서를 만들려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마음을 가다듬어 자신에게 집중하며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마음을 붙들어 두어야 한다. 

돈 때문에 분노하는 사람은 돈에서 해방되는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이는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시기심, 질투심과 미움의 씨를 없애야 한다. 내 편이 아닌 다른 편에 속한 이의 이야기를 가혹하게 비판하고 적대시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나 자신 보다는 상대의 허물만 바라보려 한다. 내가 아닌 타자에게 우리 진영이 아닌 상대 진영의 사람에게 쏠려 있는 나의 눈과 마음을 돌려 스스로에게 집중해야 한다.

스님들은 동안거에 들어가기 전에 고불문(告佛文)을 낭독한다. 부처에게 고하는 글이다. 

“당신께서는 녹아원에서 처음으로 법륜을 굴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욕망의 길이요, 하나는 혐오의 길이다. 고통의 나락으로 이끄는 두 갈래 길을 떠나 그 가운데 길을 걸어라. 이 길을 걸으면 눈이 밝아지고 지혜가 늘어나고 갈등과 대립이 사라지고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며 모든 고통이 소멸할 것이다’.”

갈등과 반목, 증오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 내면세계에 함몰하는 명상에 있다.  명상을 통해 붓다처럼 행복한 자가 돼보고 싶지 않은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