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11] 외로움이 필요한 시간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11] 외로움이 필요한 시간
  • 변구일 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번역팀 선임연구원
  • 승인 2019.11.29 14:01
  • 호수 6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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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필요한 시간

쓸쓸히 금학 더불어 파직되어 돌아오니

국화는 여전하고 대나무가 사립을 지키네

병든 방에서 추위를 만나 말똥을 때고

어버이께 올릴 양식 없어 관복을 파는 신세

벌레는 긴 밤 내내 우니 충직한 모습에 부끄럽고

새는 깊은 숲에 숨으니 기심(機心) 멀리함을 알겠다오

어느 곳의 운산에서 아득히 그리워할는지

한 해의 끝에 형제끼리 만날 날을 고대하겠네

蕭然琴鶴罷官歸 (소연금학파관귀)

砌菊惟存竹護扉 (체국유존죽호비)

病室逢寒焚馬屎 (병실봉한분마시)

親廚乏供市朝衣 (친주핍공시조의)

虫鳴永夜慙修職 (충명영야참수직)

鳥在深林識遠機 (조재심림식원기)

何處雲山存緬想 (하처운산존면상)

心期歲晏鶺鴒飛 (심기세안척령비)

- 이최중(李最中, 1715~1784), 『위암집(韋庵集)』 권1 「다시 하당의 시에 차운하다[又次荷堂韻]」


이 시는 영조 연간에 주로 활동하였던 이최중이 1748년(영조24) 34세 때 지은 것이다. 이최중은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유(李濡)의 손자이고, 도암(陶菴) 이재(李縡)를 스승으로 모셔 가문(家門)과 학맥(學脈) 모두 손색이 없는 신진(新進)이라 할 만하였다. 하지만 그는 1744년(영조20) 30세가 되어서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2년 뒤인 1746년 7월 온릉 참봉(溫陵參奉)이라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제수되어 처음 벼슬길에 나갔다.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고 대관(大官)으로 올라가는 정식 환로(宦路)에서는 한참 벗어난 길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12월 병이 들어 결국 이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는데 이 시는 바로 이렇게 물러나 양병(養病)하던 시절에 지은 것이다. (중략)

이 시는 이최중이 벼슬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온 시점에서 시작된다. 금학(琴鶴)은 거문고와 학을 짝하여 말한 것인데 청고(淸高)한 은사들이 곁에 두고 애호품(愛好品)으로 삼았던 것이다.(중략) 요컨대 금학, 국화, 대나무는 모두 선비의 청빈(淸貧)한 생활과 고아(高雅)한 품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막연한 미래와 불안한 현실에 대한 고민을 걷어내고 내면의 안식을 찾기 위해 이최중이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3, 4구에서는 앞서의 고상함과 대조적인 시인의 생활을 가감 없이 묘사하고 있다. 병든 몸에 추위에 시달리는데 땔감으로 쓸 장작을 못 구해 말똥을 때는 형편이고 끼니를 잇기 힘들어 관복을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에서 가난한 살림에 시달리는 모습이 여실히 전해온다. (중략)

이어지는 5, 6구에서는 자연의 경물을 빌려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중략)

이 시절의 이최중의 시를 일별(一瞥)해 보면 대체로 평이하고 담담하게 읊조리는 가운데 쓸쓸하고 고적(孤寂)한 기운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시절의 고독이 그의 삶에 방향을 잡아주었던 것일까? 이최중은 2년 뒤 의금부 도사가 되어 벼슬길에 다시 오른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37세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고 이후로 급제자의 전형적인 경로를 밟아 승정원, 시강원, 예문관 등을 거쳐 동부승지, 대사간, 관찰사, 이조 판서, 의정부 우참찬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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