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채 어르신의 황혼 재혼기 <2>
정희채 어르신의 황혼 재혼기 <2>
  • 관리자
  • 승인 2009.01.2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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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작별 ②

우리나라의 노년 인구가 500만, 인구 비율로 10%를 넘어섰다. 평균연령은 조만간 80대에 육박할 예정이다. 더 이상 과거의 나이에 대한 인식은 무의미해 졌다. 최근 들어 가장 큰 변화는 황혼재혼으로 대변되는 노년세대의 적극적인 반려자 찾기다. ‘열 효자보다 악처 하나가 낫다’라는 말은 인생에서 반려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본지는 신년 특별기획으로 정희채(78) 박혜숙(69)어르신의 사례를 소개하는 지면을 마련했다. 정희채 어르신은 16년간의 재혼생활을 꼼꼼하게 육필로 눌러 써 내려왔다. 본지는 정 어르신의 소중한 자료를 단독으로 입수해 독자여러분들께 성공적인 황혼재혼의 요소를 20회에 걸쳐 소개한다.

 

 

서울에 도착해서 1년여를 떠돌았다. 생에 아무런 의지도, 목표도 없었다. 한번 사로잡힌 무기력감은 처절한 절망의 나락으로 나를 이끌었다. 죽으려고 약방에서 수면제를 사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알토란같은 아이들은 또 누가 건사할 것인가.

 

가장의 가출로 인해 집안 식구들도 힘겨운 1년여를 보냈을 것이다. 결국은 고향에 있던 형님이 수소문해 나를 찾아 가족들을 올려 보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생전 험한 일이라곤 해본 적 없던 내가 막일을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이어 나갔다.


생과 사의 갈림길을 몇 번이고 넘나들며 만고풍상을 다 겪고 인생의 밑바닥을 헤매기를 무려 십수년. 죽음과 삶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항상 가슴속에 품고 살았으니 그 삶이 오죽하였겠는가.


인생 밑바닥이라는 말도 이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궂은일이라는 것은 안 해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 앉아 힘들고 서글픈 인생을 한탄하며 시름에 잠겨 있을 때 우연히 아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맥없이 앉아서 일하는 모습을 계속 살폈다. 시장 안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시키는 대로 하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일을 하는 아내를 보면서 갑자기 나는 회한에 잠겼다. 불현 듯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남자로서 또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과 마땅한 권리에 대한 열망이 마구 끓어올랐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죽음과 다름없던 삶을 살았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맥없이 늘어뜨렸던 팔에 힘을 주고 주먹을 쥐었다. 허벅지에 힘을 주어 일어서며 나는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치받는 것을 느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노동은 이제 미래에 대한 희망과 목표를 향한 것이 되었다. 그 이후 몇 년을 더 막노동판에서 전전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그렇게 모은 밑천으로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를 열었다. 삶의 희망을 가지던 시기였다. 한번 목표가 생기자 그냥 저냥 사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싶었다. 가게 앞에는 간판가게가 있었다. 당시의 간판이라 하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간판 틀에 페인트 글씨를 써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글씨에는 자신이 있었다. 다짜고짜 주인에게 일을 좀 할 수 있겠냐고 운을 뗀 뒤, 몇 번의 작업을 통해 내 솜씨를 보여줬다. 금세 기술을 익히는 것을 본 간판가게 사장은 나를 채용했고, 간판기술자로 일하면서 좀 더 나은 삶을 꾸려갈 수 있었다.


몇 년을 더 고생하니 결국은 서울의 변두리에 조그만 기원을 하나 마련하게 되었다. 1984년 12월 20일 드디어 내 사업을 펼친 것이다. 내 사업장을 가지게 되니 마음도 한층 여유로웠다. 불규칙한 품팔이 노동의 수입보다 나았고 생활의 안정도 가져와 일단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첫 사업으로 시작한 기원이 내 인생의 또 한 번 전환점이 되었다.

 

운이 맞아서인지 기원을 연 직후 우리 바둑계에 이창호라는 바둑신동이 나타나 승승장구 대혁명을 일으켰다. 국민들의 관심이 급증했고 우리 기원에도 손님들이 몰렸다. 생활이 안정되자 부부간의 멀게만 느껴졌던 거리감도 좁힐 수 있었다. 대화도 제법 자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놈의 여보, 당신이란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인간적인 학대나 폭력은 없었다 하더라도 인생에서 심리적인 고통을 늘 안고 살게 한 책임을 무엇으로 다 갚을 것인가. 되돌아보면 미안하기 한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경위와 어찌 됐든 한번 짝지어진 부부니깐 우리 전통 문화의 관례를 따라 꾹 참고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행복의 원천인 가정도 지킬 수 있었고 좋은 직장에서 나름대로 소시민의 본분을 다하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의 병이었을까.

 

그 당시에는 죽어도 할 수 없었던 여보, 당신이라는 말.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던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한 가정을 위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남편을 위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쏟아내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던, 근면하고 성실한 자태를 지닌 아내였다.


아무튼 뒤늦게나마 생활도 점차 안정이 되고 부부사이가 원만해 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희망과 행복한 훗날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신파극의 한 장면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제 겨우 모든 상황이 좋아져 살만하니까 여기까지가 한계점이었다는 것을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간신히 부부관계를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는 갑자기 뇌졸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향년 57세였다. 지난 날들에 대한 후회와 허무함은 다시금 나를 괴롭혔다. 그 회한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날들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정리 함문식 기자
moon@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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