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시대의 얼굴’ 전,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엔 이미지 보정 흔적 많아
국립중앙박물관 ‘시대의 얼굴’ 전,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엔 이미지 보정 흔적 많아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05.21 15:11
  • 호수 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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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 등 여러 상징으로 표현한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장미꽃 등 여러 상징으로 표현한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150년 역사의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셰익스피어’ 등 78점 전시

뉴턴‧다윈 등 과학자, 비틀즈‧애드 시런 등 유명 가수 초상화 눈길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중세 유럽 귀족들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왕족이나 귀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이다.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을 그린 초상화에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다.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과 쇠퇴한 왕국을 이끈 고종의 어진에는 당시 두 사람이 겪었던 시대적 상황이 엿보이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 전문 미술관인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소장한 명작을 통해 이러한 초상화의 매력을 소개하는 전시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8월 15일까지 진행되는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전에서는 500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영국을 비롯해 세계 역사와 문화를 빛낸 인물들의 초상화 78점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극작가 셰익스피어(1564∼1616),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2 ∼1727), 진화론자 찰스 다윈(1809∼1882), 소설가 찰스 디킨스(1812∼1870),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24) 등 면면도 화려하다.

1856년 문을 연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 역사와 문화에 기여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그림을 넘어 사진까지 범위를 넓혔으며, 백인 상류층 위주에서 다양한 인종과 소수 계층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왕족을 제외하고 사후 10년이 지난 인물의 초상화’라는 원칙도 바꿔 생존 유명인의 초상화도 수집한다. 1991년생인 대중 뮤지션 에드 시런의 초상화가 소장 목록에 포함된 배경이다.

전시는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과 자화상’ 등을 주제로 초상화가 가진 다양한 의미를 전달한다. 초상화는 16세기에 나무판에 그린 것부터 홀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형식을 아우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맨 먼저 영국이 낳은 최고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초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셰익스피어 생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회화 형태의 초상화로, 동시대 배우 겸 화가 존 테일러가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예술성보다는 역사적 가치에 주목해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맨 처음 소장한 작품이다. 수백년 세월에도 여전히 빛나는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세계사를 다시 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초상화도 인상적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 스물다섯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45년간 잉글랜드를 극빈국에서 유럽 최강국으로 끌어올렸다. 단순히 통치만 잘한 게 아니라 이미지 정치에도 능했다. 초상화를 통해서다.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소장한 초상화 속 여왕은 당시 42세. 하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이미지로 표현되도록 조작을 비롯한 여러 장치를 쓰게 했다.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의 뒷면을 X선으로 투과시키면 젊은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눈, 코가 본래의 위치보다 위로 수정됐음을 알 수 있다. 펜던트의 불사조 문양은 영원불멸의 권위를, 튜더 왕조의 상징인 장미꽃은 자신이 적통임을 세상에 웅변한다. 또 순결의 상징인 진주로 무수히 장식해 ‘처녀 여왕’의 이미지를 한껏 강조한다.

초상화를 통한 이미지 연출은 당대의 유명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이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로 잘 알려진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20대에 필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의 꽃미남 초상화를 판화로 제작해 출간하는 소설책에 함께 넣어 팬층을 두텁게 쌓았다. 17세기 영국 왕 찰스 1세(1600∼1649)의 정부였던 여배우 넬 귄(1651∼1687)도 만만찮았다. 빈민 출신인 그녀는 화가들이 가장 섹슈얼한 이미지로 자신을 그리게 함으로써 뭇 남성을 울렸고 마침내 왕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

우수에 젖은 눈빛을 잘 담아낸 팝가수 애드 시런 초상화.
우수에 젖은 눈빛을 잘 담아낸 팝가수 애드 시런 초상화.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있다. 1960년대 세계적인 록 밴드 비틀스와 그들을 잇는 요즘의 세계적인 영국 팝가수 에드 시런(30), 당대 최고의 배우 오드리 헵번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정치 숙적 올리버 크롬웰(1599∼1658)과 찰스 1세 등이 그런 예이다.

아이작 뉴턴의 초상화는 실제 뉴턴이 사망할 때까지 소장한 작품이다. 당시 동료를 비롯해 각종 기관에서 뉴턴 초상화에 대한 수요가 많았고, 뉴턴은 기꺼이 그 대상이 돼 줬다고 한다. 여러 영국 국왕을 그린 화가 고드프리 넬러의 손에서 태어난 이 작품은 넬러와 뉴턴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시점에 그려졌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은 뉴턴의 천재성을 드러낸다.

반면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 다윈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초상화 속에서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 

17세기 바로크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 ∼1640), 초상화의 대가 조슈아 레이놀즈(1723 ∼1792), 빛의 화가 존 컨스터블(1776∼1837), 20세기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 21세기인 요즘 상한가를 치는 데이비드 호크니(84) 등 세계 미술사를 바꾼 거장들의 작품도 나왔다. 금박 액자에 걸린 고전주의 초상화만 나왔다면 자칫 단조로울 수 있지만, 이처럼 시대가 바뀌며 양식도 달라진 다양한 초상화가 나와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바로크에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팝아트 등 회화사의 맥락에서 초상화 제작기법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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