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의자
두 개의 의자
  • 정재수
  • 승인 2009.02.1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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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전 농협대 교수

세기의 화가 반 고흐의 작품 중 의자를 그린 두 폭의 그림이 있다. 한 폭의 의자에는 파이프가 놓여있고, 다른 한 폭의 의자에는 촛불이 세워져 있다. 파이프가 놓여 있는 그림은 그 의자의 주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촛불이 세워져 있는 의자는 주인이 세상을 뜨고 없다는 뜻을 갖는다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은 파이프가 있는 의자에 촛불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이는 송나라 주신중(朱新仲)이 말한 삶의 오계(五計) 즉, 생계(生計), 신계(身計), 가계(家計)를 비롯해 늙으면서 계획해야 한다는 노계(老計), 죽기 전에 세워야 한다는 사계(死計)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죽기 전 계획’이란 매우 충격적인 말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한번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각오하며 진실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삶의 태도는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노인들은 어떤 의미로든 죽음을 생각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늙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이별의 준비기간이 있어야 하며, 그날이 오늘도 내일도 아닌 먼 훗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도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면 그때서야 자기 일임을 실감한다. 그러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또 다시 방심하며 남의 일로만 생각하게 된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얼마나 지루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늙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신의 은총일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저 세상이 미지의 세계이고, 누구에게도 경험담을 들을 수 없으며 가보고 다시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동안 함께 한 육신이 한줌의 흙이 되는 것만은 확실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지만 살았을 때 육체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 서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아프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떠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노인들의 가슴을 채우고 있을지 모른다.

노인들은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다. 이것은 이래서 못 버리고 저것은 저래서 놓아둔다. 3년 이상 쓰지 않은 물건은 과감하게 버리는 것을 생각해 보자. 버리기 아깝다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된다. 물건을 적게 갖고 공간을 넓고 편안하게 하며, 내가 죽은 뒤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국보급 보물이 아닌 이상 남겨둬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자연스럽게 가려질 것이니 자기가 쓰던 물건은 자기 손으로 버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늙으면 남자도 여자도 점차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되면서 가깝던 사이가 점점 멀어져가니 너무 슬픈 일이다. 서로 다정하게 잘 지내야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병든 사람의 고통과 불평도 들어주고 잠든 배우자의 굳은 손마디라도 잡아주며 노부부의 마지막 삶을 살다보면 마주잡은 손의 온기가 후회 없는 삶이 아닐까.

늙으면 고독해진다. 슬하에 자녀들도 독립하고 정다운 친구도 멀리 세상을 떠나는 한편 평생 같이 했던 배우자도 언젠가 세상을 등진다면 심한 고독과 함께 혼자만의 삶이 된다.

함께 웃을 친구도 없고 서로 이야기할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니 고독을 견디며 공허함과 소외감에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고독을 견디는 힘을 자신의 마음에 길러 준비해야 할 것이다. 반 고흐 그림의 의자와 같이 파이프가 있던 자리에 촛불을 세우는 마음으로 인생의 마무리계획을 세워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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