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불쌍 척도 점수 / 이호선
[백세시대 금요칼럼] 불쌍 척도 점수 / 이호선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21.10.01 14:18
  • 호수 78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수십 년을 함께 살다가

노년에 이혼을 결심하는 분들은

배우자가 불쌍하지는 않은지

자식들에 어떤 존재일지 물어야

연민이 깊다면 분노는 가라앉아

“이 사람하고는 더이상 못살아요!” 이혼을 선언하며 마지막 결정을 위해 상담자를 방문한 72세 여성의 선언이었다. 50년 넘게 함께 살았던 분이 더이상 못 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의 결정을 앞에 두고 더 살라고 하거나 용서하라는 말은 그분의 전 생애에 대한 무례일 것이다. 

이런 순간에 나는 늘 속으로 묻는다. 왜 여기까지 오셨을까? 요즘 이혼이야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가 된 세상이 되었고, 절차를 알아보시려면 법원을 방문하거나 변호사를 만나면 될텐데, 굳이 2시간 30분이나 들여 나를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

‘못살겠다’와 ‘살겠다’ 사이에는 ‘그 사람과 왜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이 있다. ‘왜 살아야 하나?’라는 존재론적 질문과 ‘그 사람과’라는 관계적 질문의 값의 평균이 ‘못살겠다’와 ‘살겠다’ 사이에 있는 눈금을 움직일 것이다. 

‘살겠다’ 쪽으로 눈금이 움직이길 바라는 분들에게 나는 자기연민지수, 일명 불쌍 척도를 묻는다. 전혀 불쌍하지 않다가 1점, 너무나 불쌍하다를 10점으로 하여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다. 

못살겠다고 선언하는 분들 중에 배우자에게 매우 박한 점수를 주는 분들도 있고, 생각보다 후한 점수를 주는 분들도 있다. 배우자보다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분들이 꽤 많지만, 생각보다 압도적으로 많지는 않다. 

스스로가 왜 불쌍한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면 그야말로 구구절절이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채 다 쓰지 못할 사연들이 가득하고, 굳이 책으로 치면 고생 백과사전이고 억울 시리즈가 이어진다. 

반면, 그 반대상황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배우자 불쌍 척도에 대해 왜 불쌍한지, 어떤 점이 그런지를 물어보면, 대부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살아온 세월 동안 잊고 있었던 배우자의 기여와 그가 가족을 위해 포기했던 것들에 대한 진술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떤 약속이라도 한듯 ‘그 양반도 고생을 많이 했지요’로 마친다.

‘내가 그 인간이 불쌍해서 산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곤 한다. ‘불쌍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슬픔을 느낄 만큼 처지가 어렵거나 불행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배우자를 슬픔으로 느낄 만큼 처지가 어렵거나 불쌍한 사람으로 느끼기까지 참으로 오랜 감정의 지름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시간을 거스르고 지금의 감정에서 멀어져 아득한 과거 속 기억 캡슐에서 그의 통증을 소환해와야 비로서 그가 불쌍하고 그녀가 안타깝다. 그 애처로움이 있다면 그 부부는 산다.

물론 자신의 불쌍 척도가 배우자의 불쌍 척도와 너무 크게 차이가 난다면 억울해서 못산다. 그리고 배우자의 불쌍 척도가 내 점수보다 훨씬 높았다면 상담실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못살겠노라하고 오시는 분들은 내 점수와 배우자의 점수가 평균 2점 정도 차이가 난다. 2개의 감정 징검다리를 건너야 할 나이 들어가는 부부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까?

부부가 헤어져야 할 이유는 오만가지지만, 부부가 함께 살아야 할 이유 역시 오만가지이다. 그중 부부가 꼭 살아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의 이름은 참으로 다양하다. 친절, 인내, 연민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의 이유로 애 아빠, 애 엄마 등 아이를 위한 사랑의 이름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불쌍해서도 살고, 헤어지면 억울해서도 산다. 사는 이유도 가지가지다. 

자, 오늘 배우자를 쳐다보며 불쌍 지수를 떠올려보자. 내 남편, 내 아내가 나와 살면서 겪은 숱한 일들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말해보자 ‘당신도 참 불쌍하게 살았네!’ 불쌍 척도만으로도 살 수 있다. 

둘째, 나랑 밥 먹고 싶냐고 물어보자.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는 함께 목표하는 시공간을 공유하고, 대화 가능 공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밥 먹는 것으로 만든 이의 성취와 먹는 이의 고마움을 확인할 수 있다. 말이 없어도 밥을 먹을 수 있는 사이면 된다. 

셋째, 애들에게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자식들에게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물어보자. 회복을 원한다면 다가갈 이유를 발견하자. 기여점을 찾아내어 마음의 명분을 주자. 

오래 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잘 산다는것은 더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나 생각해보면 분노의 우물에 억울함이 차올라올 것이다. 그때 한 번쯤 물어보자.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마음 질문을 배우자에게도 해보자. 

시야를 넓혀야 남의 불행이 보인다. 남의 불행이 보여야 비로소 내 마음 우물의 분노의 물 수위가 내려간다. 오래 산 부부들에게 권한다. 이미 내 점수는 차고 넘치니 가끔씩 불쌍 척도로 상대방을 짐작해보자. 연민의 바람이 불어야 분노의 물이 마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