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와 스카치테이프
손녀와 스카치테이프
  • 관리자
  • 승인 2009.03.27 14:11
  • 호수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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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최해규 경기 용인 기흥구 중동대원칸타빌A 경로당 회장
▲ 최해규 경기 용인 기흥구 중동대원칸타빌A 경로당 회장
70세가 되고 보니, 존대 받던 직장에서도 은퇴하게 됐고, ‘호랑이’ 별명도 자연스럽게 빼앗겼다. 이제 눈치나 보며 살아가는 나그네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란 질문을 던져본다.

여생의 행복한 생존을 위해 잔머리를 굴려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나마 위신을 세울 수 있고, 기쁨과 수월성까지 겸한 방법으로 4세된 손녀와 친구가 되어 주는 일이었다.

손녀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그런데 나의 친구가 된 손녀는 “학생 여러분, 선생님 따라 하세요”라며 자기는 선생님이고 할아비인 나는 학생 취급이다. 대답이 작다며 큰 소리로 ‘네! 네! 네!’ 따라 하라고 명령도 한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늙은 학생이 어린 손녀 선생님의 율동을 따라하자니 우습기도 하고 한편 처량하기도 하다. 한바탕 학생 노릇을 하고 났더니 진땀이 난다.

늙어 가는 것도 수월치가 않다. 사방이 결리고 자리에 누워 있기를 좋아하게 되고, 모든 것이 귀찮아지며, 작은 일에도 소외감을 느껴 섭섭해지니 잔소리만 많아지게 된다. 잔소리가 많아지니 좋아할 식구도 없고 응수해 줄 이도 없다.

옛날에는 새색시가 시집을 와서 벙어리 3년,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이 돼야 귀한 가문에 진정한 효부 며느리가 된다고 했다. 지금은 이 이야기가 농경사회에 잔존한 말로 여겨지게 됐다.

요즈음 새색시를 보라. 얼마나 의기양양한가. 사리에 맞는 말을 거침없이 하므로 늙은이의 기가 팍팍 죽어간다.

늙어지면 자연히 귀가 어두워 잘 듣지도 못한다. 눈이 나빠져 돋보기를 벗으면 장님과 다름없다. 말도 어둔해져서 긍긍 거리니 벙어리와 무엇이 다른가.

늙은이 수명이 길어져 90세까지 산다면 나는 아직도 20년은 더 살아야 한다. 기나긴 그 세월을 어찌 죽은 듯 살까.

급변해 가는 세월 속에서 과거나 반추하며 사는 늙은이와 젊은 세대와는 생각이 하늘과 땅처럼 멀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생각은 더더욱 상상을 초월해 무섭기도 하다.

허나 어쩌랴.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란 말을 새기며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이 되어 살 수밖에.

이제 내 친구는 4살짜리 손녀 밖에 없다. 그래서 친구 같이 다정한 말투로 “뛰면 넘어진다. 조심해”라고 했는데 그 말도 잔소리로 들었나보다.

손녀가 ‘팽’ 하니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온 손녀딸 손에는 스카치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걸로 뭘 하고 놀 거야?”

혹시 장난거리를 만들어 나와 함께 놀아줄 건가 기대 반 눈치 반을 섞어 물었다.

“할아버지 입에다 붙일 거야.”

입을 앙다문 손녀딸이 진짜로 테이프를 잘라 내 입에 겹겹이 붙이기 시작했다. 테이프를 다 붙이고 나서는 “이제 잔소리 하지 마. 학생은 잔소리 하면 안 돼! 알았지?”라면서 까르르 웃는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잔소리는 더더구나 못하는 신세가 되어 멍청히 앉아 당할 수밖에.

내 꼴을 보며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고, 뒹굴며 웃던 손녀가 한참 후 안쓰러웠던지 내 입에 붙은 테이프를 모두 떼어내는 것이었다. 수염에 테이프가 붙었으니 뗄 때의 아픔도 상상 해 보라.

“아야, 아야! 선생님, 살살 떼세요! 너무 아파요!”

그러면서도 야들야들한 손녀딸 손길이 얼마나 향기롭던지 어린애처럼 얼굴을 맡긴 채 맘껏 엄살을 부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깨달은 바도 크다.

‘늙은 사람들은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이 될 때 진정한 행복 자가 된다’는 것을 만천하 늙은이들에게 알리고 싶다.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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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2009-07-02 19:20:25
늘 앞선 생각으로 후진들에게 모범이 되시고 좋은 습관과 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 주님안에서 기도 하며 말씀으로 인도해주시는 큰 선생님 최해규 장로님 늘 맘 깊이 존경과 감사를 가슴에 품고 장로님 생각합니다. 언제나 많은 후배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앞서서 저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시는 존경하는 선생님이 계셔서 저는 늘 행복합니다. 건강하시고 주님의 은혜안에서 귀한 주의 뜻을 이루어 드리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