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인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사진으로 돌아보는 ‘달동네’의 아련한 추억
[탐방] 인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사진으로 돌아보는 ‘달동네’의 아련한 추억
  • 함문식 기자
  • 승인 2009.04.07 11:10
  • 호수 1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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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국산 박물관에는 유리상자 안에 갇힌 전시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도국산 일대를 뒤덮었던 몇십년동안의 풍경인 골목길 및 점포가 실물 그대로 재현돼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몇몇 가옥들들은 박물관 안의 세트건물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다.

숨가쁘게 살아온 지난 한 세기. 그 한세기를 오롯이 관통해 온 노년세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엄청난 시련속에서도 꿋꿋이 일어나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을 이뤄냈다.

그러나 결실이 어찌 희생없이 있었겠는가. 외세의 핍박과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살아온 지난 세월은 그야말로 한과 눈물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지난한 살이에서도 우리네 이웃들은 인정과 화목함을 가지고 어려운 세월을 헤쳐 나갔다.

어려워도 서로 인정이 넘쳤던 시절. 그래서 노년세대들은 잘 먹고 잘 사는 지금보다 오히려 어려웠지만 서로가 보듬어 주는 그 시절을 추억하는 분들이 많다.
 

▲ 인천 수도국산 정상 부근에 있는 노후주택에도 어김없이 화사한 봄은 찾아왔다. 지금은 대부분 철거됐지만 예전엔 산 전체가 판자집 내지는 루핑을 얹은 블록주택이었다. 간신히 명맥만 남은 잘동네의 옛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인천 동구는 수도국산 정상에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을 마련, 노년세대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달동네’라는 명칭은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별과 달이 잘 보인다는 의미로 ‘달나라 천막촌’에서 유래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0~1960년대 실향민들이 도심으로 유입하기 시작하면서 천막촌이 여기저기 생겨났는데, 정부에 의해 도심에서 쫒겨난 판자촌 주민들이 인근의 야트막한 산등성이로 올라가 판자로 집을 짓고 산 것에서 출발했다.

 

‘달동네’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 것은 1980년 TV 일일연속극 ‘달동네’의 방영 이후부터다. 어려운 처지에서도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이 연속극이 큰 인기를 누리면서 ‘달동네’는 불량 노후 주택이 밀집해 있는 산동네의 대명사가 됐다.

 

 

 

 

▲ 수도국산 박물관에는 유리상자 안에 갇힌 전시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도국산 일대를 뒤덮었던 몇십년동안의 풍경인 골목길 및 점포가 실물 그대로 재현돼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몇몇 가옥들들은 박물관 안의 세트건물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다.

 

서울과 수도권의 달동네는 90년대 이후 대부분 철거됐다. 그러나 인천의 ‘해반문화사랑회’는 100년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천 구도심의 문화를 보존하고 달동네의 풍경이 우리의 ‘근대’를 상징한다고 판단, ‘달동네 박물관’을 건립할 것을 주창해 동구청과 함께 박물관을 열었다.

박물관에는 단지 유물이 전시돼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았던 가옥과 거리가 실제 모습으로 완벽히 재현돼 있다. 관람객이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실제 달동네 거리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일상생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20분 단위로 밤과 낮이 바뀐다. 거리에는 고양이 울음소리, 야경꾼 딱딱이 소리를 들으며 실제 물지게를 지거나 연탄을 갈아 볼 수도 있다. 세트로 만들어진 공동화장실에는 ‘전시물입니다. 용변보지 마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을 정도로 세트라기 보다는 실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우리의 근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조금 불편했을 뿐이었다. 어렵지만 서로의 인정이 넘치고 서로를 배려했던 그 시간속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인천의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을 찾아봤다. 

 

 

 

 

 

 

 

 

 

 

배가 산으로 갔다? 수도국산 정상에 배모양을 한 건물이 바로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이다. 인근에 ‘배다리’라는 지명이 있는데, 예전에 제물포항이 개항했을 때는 배가 인근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해발 53m의 수도국산은 산이라기보다는 야트막한 언덕에 가깝다. 본래 송림산이라고 불렸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시설이 들어선 이후 수도국산으로 불렸다. 수도국산 일대의 판잣집들은 집집마다 수도를 놓을 처지가 되지 못해 공동수도에서 돈을 내고 물초롱에 물을 받아다가 쓰곤 했다. 

 

박물관에는 전시품들이 유리상자 안에 전시돼 있는 것이 아니라 달동네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인물을 통째로 옮겨 놓았다. 거리를 걷다보면 20분 단위로 낮과 밤이 바뀌고 개짖는 소리, 고양이 우는 소리도 들린다. 방과 마루에 들어가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다. 이곳을 찾은 관람객들은 “자신은 향수를 반추할 수 있고, 아이들에겐 세대간 이해에 좋은 교육공간”이라고 말한다.

 

 

 

 

 

부엌의 모습. 부엌은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하는 공간이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이곳에서 쪼그려 앉아 식구들이 남긴 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곤 했다.

 

 

 

 

 

TV가 있는 집. 당시 TV는 대단한 인기였다. 주인집 밥 먹는 시간에는 가지 못하고, 주인집과 친분이 있는 사람만 가서 봤기 때문에 주인 눈치를 많이 볼 수 밖에 없었다. 요즘말로 하면 ‘문화권력’이라 할 만 하다. 허준호(74)씨는 “드라마 ‘여로’ 할 때는 대단했지. 우리 집에 TV가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봤는데, 주인인 나는 방 구석으로 밀려나서 밥을 먹었다고. 근데 그게 불편하지 않고 참 재밌었어. 여럿이 보면 더 재밌잖어. 어려운 시절이니 그만큼 더 인정이 넘쳤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보통 장독대는 부엌 가까이에 놓지만 달동네는 공간이 협소했기에 지붕 위나 대문 위에 많이 올려 놓고 살았다. 식구들이 먹을 각종 장과 소금, 말린 생선 등 식구들의 부식을 저장하는 공간이었으며, 더러는 상추나 고추같은 작물을 조금씩 재배하기도 했었다.

 


 

 

 

연탄가게 주인 유완선(1936년~) 어르신. 수도국산 달동네가 사라질 때까지 연탄을 배달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 달동네 사람들은 유 어르신에 의지해 겨울을 나야했다. 한 장에 4kg정도 하는 연탄 25장을 지고 고지대를 오르면 금세 숨이 턱에 찬다.

유 어르신은 고지대라는 이유로 공장에서 연탄을 대주지 않으면 공장까지 찾아가 항의를 했다고 한다. 현재는 이주해 용인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인천기계제작소(현 대우중공업)에서 일하다가 퇴직 후 폐지를 모아 더 어려운 이웃을 도왔던 맹태성(1917년~2000년) 어르신, 3대째 가업을 계승하면서 재래식 솜틀기로 영업했던 은율솜틀집 주인 박길주(1956년~2004년), 15세부터 이발기술을 배워 쭉 자리를 지켰던 대지이발관 주인 박정양(1943~)씨 등 수도국산 달동네를 지켰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실물 그대로 전시돼 있다.

 

 

 

절미통과 절미저축통장. 아침, 저녁으로 식구들마다 두 숟가락씩 덜어서 넣어 두었다. ‘1조저축’이라고 써 있는 절미통은 절미해서 1조원까지 모아보자는 희망이 담겨있다. 절미금고에는 ‘푼돈모아 황소사자’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집집마다 수도를 놓을 수가 없어 공동수도에서 돈을 내고 물초롱으로 물을 받아 썼다. 물초롱은 겉으로 보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균형잡기가 어려울뿐더러 물초롱을 지고 산비탈을 올라가려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고무신 땜질하는기계. 모든 물자는 고쳐 썼다. 알전구를 넣어 양말 꿰매신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양은 솥이나 냄비도 구멍이 나면 알루미늄 조각을 불에 달군 부지깽이로 땜질해서 썼다. 흔하게 물건을 사고 버리는 지금 생각하면 궁상맞아 보이지만, 뭐든 버리지 않고 다시 쓰는 정신이 우리의 지금을 만든 것이다.
 

 

 

 

운영시간 : 09: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200원, 65세 이상 무료.
문의 : 032-770-6131, www.icdonggu.go.kr/museum

함문식 기자 moon@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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