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해방 이후 혜성처럼 등장한 가수 현인 / 이동순
[백세시대 금요칼럼] 해방 이후 혜성처럼 등장한 가수 현인 / 이동순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2.08.29 11:27
  • 호수 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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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은

 목젖 떠는 독특한 창법·음색으로

 해방 맞은 국민들에 신선한 충격

‘비내리는 고모령’도

 식민지 시절 이산의 아픔 잘 담아

8월은 민족해방의 감격이 서려 있는 달입니다. 부산 중구 중앙동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40계단이 있지요. 바로 그 위에 지어진 40계단 문화관 전시실에는 특별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피난살이 설움과 망향의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1950년대 대표곡 앨범, 각종 공연 사진, 악극단 전단지, 작곡가의 자필 악보, 가요사 관련 중요 사진 자료들, 과거의 녹음기와 축음기 등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친필, 작곡가 김교성 선생의 친필 악보, 가수 백난아와 금사향의 친필은 귀한 자료입니다. 

이제는 거의 빛바래져 가는 당시 흑백 사진들에서 낯익은 가수의 얼굴을 발견할 때는 마치 가수를 직접 대면한 듯 가슴 속은 흥분과 감격으로 설렙니다. 

입구에서 당시의 애환을 담고 있는 조각 작품을 눈물겹게 감상했습니다. 물지개를 진 소녀, 튀밥 튀기는 노인, 혼자 계단에 앉아 아코디언 켜는 사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습니다. 모두 우리 어린 시절의 추억어린 유물들이어서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발걸음을 옮겨 영도다리로 천천히 접어듭니다. 과거 식민지 시절, 개폐식으로 제작된 다리가 오랫동안 일반 교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예전처럼 개폐식으로 복원됐지요. 

다리를 건너 영도 쪽으로 들어서기 직전 오른편에 앉아있는 반가운 얼굴을 만납니다. 가수 현인(봉면 현동주, 1919~2002) 선생의 동상. 그분은 혼자 바다 쪽을 보며 앉아서 물끄러미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노래 활동을 시작한 이른바 ‘가수 1세대’의 대표적인 대중가수지요.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말 일본 도쿄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습니다. 전공 분야는 베이스바리톤입니다. 일제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태양’이란 이름의 악단을 조직해 활동했고, 1946년 귀국해 해방된 조국에서 악단을 조직한 뒤 극장 무대에서 연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작곡가 박시춘과 운명적 만남의 과정을 거쳤고, 마침내 순수음악의 자부심으로 꼿꼿하던 현인은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해방 직후 우리 가요계에는 해방의 감격과 민족국가 건설에 부합하는 특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필요했습니다. 종래의 가수들 창법은 대개 너무 슬픔을 자아내거나 처량한 음색들로 일관했지요. 그런데 가수 현인이 해방정국의 분위기를 담아내는 목소리의 적임자로 떠올랐습니다. 

목젖을 덜덜 떠는 듯한 현인의 독특한 창법과 음색으로 취입한 ‘신라의 달밤’은 과거의 틀에 박힌 창법에 피로를 느끼던 대중들로 하여금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맑고 깨끗하며 경쾌한 스타카토 발성법은 해방된 조국의 벅찬 시대적 감수성을 한껏 만끽하기에 특별한 즐거움을 제공해 주었지요. 여기에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와 경주 테마도 한몫 했습니다.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당시 민족국가 건설의 부푼 꿈을 안고 활동하던 청년들에게 벅찬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현인이 럭키레코드사를 통해 잇따라 발표한 ‘비 내리는 고모령’은 식민지 시절의 가족 이산과 그 눈물겨운 곡절을 고스란히 되살려준 노래로 크나큰 감명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 노래는 대구의 고모령 언덕을 배경으로 만든 가족 이산의 노래였습니다. 

현인의 대표곡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1953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발표된 ‘굳세어라 금순아’ 노랫말에는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전쟁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낯선 타향에서 고통받아야 했던 월남 실향민들의 슬픔은 이 가요작품에서 모두 절절하게 재생되고 있습니다. 

1·4후퇴와 흥남철수의 후유증은 고스란히 대구와 부산으로 밀어닥쳤습니다. 대구의 양키시장과 부산의 국제시장은 생존을 위한 그들의 마지막 공간이었습니다. 완성된 가사에 감흥을 얻은 박시춘은 곧바로 작곡에 들어갔고, 오리엔트레코드사 2층의 다방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 군용담요를 창문에 겹겹이 가리고 참으로 눈물겨운 녹음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가요작품이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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