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가을에 절실한 건 편지가 아니다! / 이호선
[백세시대 금요칼럼] 가을에 절실한 건 편지가 아니다! / 이호선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22.10.24 10:56
  • 호수 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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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가을에 절실한 것은

낭만을 담은 편지 쓰기가 아니라

편지의 수취인을 찾는 일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가입해

추억 만들 새 친구를 만들어 보자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십수 년 전에는 이 노랫말을 시작으로 가을이 왔다. 글의 수신인이 누구건 가을엔 편지를 써야만 할 것 같았다. 깃마다 누렇게 땟자국이 바랜 트렌치코트를 입고 바닥을 쓸고 다니다 보면 어느덧 눈이 오곤 했다. 우리의 가을은 그렇게 편지로 시작하여 눈길 위 트렌치코트로 마감됐다. 

시간이 지나 작금에 무슨 편지겠는가. 라디오사연 마저도 편지가 거의 없는 마당에 연인끼리 가족끼리의 편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입대 후에도 한 두 통의 편지를 쓰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인터넷 상으로 열려있는 편지창을 이용해 전파상으로 안부와 기쁨을 나눈다. 어떤가, 아쉬운가?  

과거가 아쉽다고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네 어머니들이 쓰셨다는 인두다리미를 지금 시절에 누가 쓰겠는가. 그렇다고 인두다리미를 다시 쓰겠다고 달려드는 이를 본 적 없다. 하려고만 한다면 할 수 있으니 다듬이 방망이가 그립거든 사다가 두들기시라! 

인두다리미 시절에 입던 옷이 없는 이 시점에 인두다리미와 다듬이 방망이는 그저 박물관행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은 반드시 과거를 삼켜버리고 편리는 늘 추억을 압도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메일이나 문자, 카톡과 같은 SNS, 동영상이 실시간으로 존재와 안부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는 요즘에 편지가 굳이 아쉽지도 않다. 

그저 ‘랑만’이 덜할 뿐이다. ‘농구’를 ‘롱구’라고 발음하시는 이북 출신 내 아버지는 ‘낭만’을 ‘랑만’이라고 발음하며, 100년 가까이 사시면서 가장 아쉬운 게 무엇인가에 질문에 대해 평안도 억양을 가득담아 “그 옛날엔 랑만이 있었디!”라고 말씀하셨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아쉬웠던 것이 ‘랑만’이었다면, 100년 세월에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 답변은 ‘랑만을 나눌 친구’였다. 오래 살면서 먼저 저세상으로 간 친구들이 있어야 ‘랑만’도 있는데, 친구가 없으니 ‘랑만’도 ‘랑만에 대한 기억’도 없어진다고 하신다.

어쩌면 나이 들어가는 우리들에게 ‘아쉬움’을 묻는 게 ‘절실함’을 묻는 것보다 책임이 덜해서인지, 젊은이들은 자꾸만 우리에게 후회를 소환하라 한다. 그러나 후회 많은 우리에게 절실함도 물어주기를 바란다. 

기초연금으로도 못 메우는 가난보다 더 절실한 바로 그 ‘친구’의 이야기를 물어주기를 바란다. 슬퍼도 혼란스러워도 기뻐도 심지어 자랑을 하려해도 세월을 나눈 나의 ‘랑만’의 동반자들은 여기 없다. 랑만을 담아 편지를 쓴들 우리가 지금 쓰는 편지는 곧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올테니 참으로 애석하다. 허나 친구가 없고 먼저 간 친구를 그리워하는 것이 어디 우리뿐이겠는가!

그렇다면 새 답을 찾아보자. 현재도 곧 ‘랑만’이 될 운명이니, 이 랑만을 생애 추억으로 만들 사람들을 찾아보자. 해묵은 이야기를 나눌 친구는 없어도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갈 이들은 반드시 있다. 

주변을 물색하고 과거를 뒤져보고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고 SNS를 파도 타듯 찾아 들어가 추억을 만들 새 대상과 집단에 끼어보자. 유튜브 구독도 하고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가입을 하는 것도 괜찮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편지를 써보자. 나의 안부를 남기고 너의 안부에 답을 하며 21세기형 ‘랑만’을 시작해보자.  

편지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편지를 보낼 것인지가 문제이며, 아쉬움이 아니라 절실함이 문제라면, 보낼 이를 찾고 절실함을 해결할 공간으로 들어가보자. 이 가을에 편지가 떠오르는 이라면, 이 가을에 아쉬움이 커지는 이들이라면, 이 새로운 ‘랑만’과 ‘절실함’의 창구에 문을 두드리기 바란다. 

고백의 마침표는 행동이다. 그립다 말하면 찾아가야 하는 것이고, 절실하다 말하면 묻고 알아봐야하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활자의 시대를 마감하고 IT혁명과 영상의 시대를 맞게 된 지금 혹시나 아쉽고 혹시나 ‘랑만’을 말하고 있다면, 아쉬움의 호흡 넘어 새로운 다짐과 고백을 시작하기 바란다. 

그리고 새 시대에 나의 다짐을 고백했다면 이제 행동으로 ‘랑만’을 만들러 출발하자. 가을에 절실한 건 편지가 아니라 수취인을 찾는 일이다. 수취인을 찾고 다시금 가을에 편지를 쓰고 그와 ‘랑만’의 돌림노래를 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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