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88] 설날 아침에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88] 설날 아침에
  •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23.02.20 09:41
  • 호수 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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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에

새벽하늘 구름이 사방 얼어 있으니

남은 추위 아직 다 못 보낸 것이고

농민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지난밤 고기를 많이 잡는 꿈 꾸었다는데

주린 처지에 배부른 꿈을 꾸었다니

그게 귀신에게 조롱당한 것 아니겠나

지난해는 다행히도 조금 넉넉했었기에

마을 사람들과 웃고 떠들 수 있으니

여기에 다시 더 욕심을 낸다면

세상일 뜻과 달리 어긋남이 많을 것이니

기댈 것은 나라가 새로워져

예로써 인재를 모으는 것

수많은 눈이 대궐을 바라보고

여러 사람이 동량을 떠받치니

이제 산동의 조서가

진심으로 백성 고통 구제함을 보겠지

우리 백성들 이미 하늘 있으니

힘써 밭 갈고 씨 뿌리기만 하면 되고

나도 산속의 삶이 편안하여

꽃에 물 주느라 날마다 단지만 안고 사네

曉天雲四凍 (효천운사동)

餘寒未盡送 (여한미진송)

爛聽農人語 (난청농인어)

昨夜多魚夢 (작야다어몽)

毋乃飢夢飽 (무내기몽포)

適被神所弄 (적피신소롱)

去年幸少豐 (거년행소풍)

笑語閭里共 (소어려리공)

況復狃望蜀 (황부뉴망촉)

世事多缺空 (세사다결공)

所賴邦命新 (소뢰방명신)

禮羅急麟鳳 (예라급린봉)

萬目瞻象魏 (만목첨상위)

衆手扶梁棟 (중수부량동)

行見山東詔 (행견산동조)

悱惻救呻痛 (비측구신통)

吾民旣有天 (오민기유천)

但可力耕種 (단가력경종)

我亦山居安 (아역산거안)

灌花日抱甕 (관화일포옹)

- 황현(黃玹, 1855~1910), 『매천집(梅泉集)』 제3권, 「기해고(己亥稿)」. 

<설날 아침 느꺼운 마음이 있어 동파의 시운을 빌려 쓰다[元朝有感次東坡韻]>


이 시는 매천 황현이 45세가 되던 기해년(1899, 광무3)의 설날 아침에 쓴 시이다.(중략) 설날을 대상으로 하는 한시의 경우 대부분 설날 아침에 지어지는데,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담는다. 한 해의 첫날이면서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인 설날 아침에 짓는 시이니 그 내용이 이런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황현의 시는 이와 조금 다르다. 황현 역시 설날 아침에 시를 지으며 이제 시작하는 한 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담았지만, 그의 기대와 희망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이 시에서 황현은 조금 넉넉했던 지난해의 수확 때문에 웃고 떠들 수 있는 설날 아침에 안도하면서 더 큰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 시를 쓰기 2년 전인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친 뒤 광무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고종의 정치에 상당히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황현은 더 큰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지만, 나라가 새로워져 예로써 인재를 모으고 있는 것에 기댄다고 했고, 그런 정치에 백성들의 시선이 쏠려 있으며, 조만간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에 가산(賈山)이 문제에게 이야기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냈다. 

(중략)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혼란의 시대를 살면서도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황현의 시를 통해 2023년은 우리 마음속에서 사그라드는 기대의 불씨가 되살아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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