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6] 발해의 자랑스런 역사 “우리도 다른 나라 침공한 적 있다”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36] 발해의 자랑스런 역사 “우리도 다른 나라 침공한 적 있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06.12 14:33
  • 호수 8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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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제1의 항구 ‘등주’(산동 펑라이시) 함락   

발해 역사 후손에 가르쳐 민족 자긍심 키워줘야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우리나라는 5000년 역사를 자랑하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굴종, 내부 분열, 패배의 비루한 역사다. 외세의 침략에 무릎 꿇고 조공을 갖다 바치고, 자기들끼리 편 갈라 싸우고, 나중에는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부녀자는 겁탈 당하고, 남정네는 살해됐고, 고귀한 문화유산은 불태워졌으며, 국토는 황폐화 됐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 승리를 거둔 자랑스런(?) 역사가 있었다. 바로 발해(渤海)이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후 30년 만에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이다. 그 영토가 사방 5000리로 뻗어나가 고구려보다도 더 넓게 진출했다고 한다. 

자랑스런 역사의 주인공은 발해 시조 대조영의 장남인 무왕 대무예(大武藝·?~737년)이다. 7~8세기 당시의 당은 동서무역을 통해 경제·사회·문화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대국이었다. 

신흥국이 이런 강국을 공격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공격의 발단은 동북쪽에 위치한 흑수말갈이란 존재 때문이었다. 발해에 조공을 바치던 흑수말갈이 어느 순간 발길을 끊으면서 한편으로 당이 흑수말갈을 흑수주(州)로 삼으며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고 공표했다.

대무예는 순간 당과 신라의 결탁으로 고구려가 멸망했던 과거의 역사가 떠올랐다. 해서 흑수말갈이 당과 연합해 공격해올까 그 점이 걱정이 됐고,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 선제공격을 취했던 것이다. 

◇거란과 연합해 2차 선제공격

대무예는 동생 대문예를 시켜 흑수말갈을 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당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동생은 당의 국력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그 지시가 무리라고 판단했다.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치면 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당과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결과는 우리의 패배가 뻔하다”면서 재고를 간했다. 형이 이를 거부하자 동생은 당에 귀화하고 만다. 

대무예는 당현종에게 사신을 보내 ‘동생을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당현종은 ‘대문예를 귀양 보냈다’고 거짓말을 하고 오히려 대문예에게 높은 벼슬을 하사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대무예는 “대국은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떻게 속일 수가 있소”라며 당현종을 비난했다. 그러는 사이에 당에 있던 대무예의 아들이 사망했다. 졸지에 왕의 계승자가 사라진 가운데 당은 왕위를 대문예에게 주겠다는 식의 암시를 했다. 이에 무왕이 분노해 무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732년 9월 대무예는 장군 장문휴에게 당 침공을 명령했다. 발해의 수군은 서해를 통해 당의 등주(지금의 산동성 펑라이시)를 공격했다. 등주는 동아시아 제1의 항구로 당의 무역 거점이었다. 수나라의 수군이 고구려 정벌 당시 이곳에서 출발하기도 했다. 

발해군의 기습으로 등주성을 지키던 당군은 제대로 대응 한번 못하고 성이 함락됐고, 등주지사 위준은 살해됐다. 이에 당현종은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를 칠 계책을 세웠다. 당현종에게서 군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은 신라의 선덕여왕은 당과 서먹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서둘러 10만 대군을 보냈다. 그러나 신라군은 도중에 추위와 눈보라로 군사의 절반이 죽어버리자 도중에 돌아가 버렸다.

대무예는 바로 2차 선제공격에 나섰다. 733년 거란족과 연합해 만리장성 앞 마도산으로 쳐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당은 군사 1만명이 목숨을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신당서 기록을 보면 “발해 무왕 대무예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고 돼 있다. 

◇ 발해, 연호를 따로 쓴 황제국

당은 발해가 만리장성을 넘어올 것을 대비해 마도산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 맞섰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는 흐지부지 됐다. 이 전투를 계기로 당은 발해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고, 발해는 국가적 자신감을 얻어 그에 걸맞는 정책을 펴게 된다. 이후 발해는 전쟁의 발단이 됐던 흑수말갈 정복을 마무리 짓고 후방을 안정시켰다. 흑수말갈은 발해에 복속됐으나 9세기 말 발해의 지방 지배가 약화되면서 떨어져 나갔다. 

발해는 중국에 부속되지 않고 연호를 따로 쓰는 등 국가 간 대등한 관계를 유지해온 황제국이었다. 이런 사실은 중국이 요즘 하는 짓거리만 봐도 짐작이 간다.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 유적 발굴을 극비리에 진행하며 남·북한 학자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지방 정권’이 아닌 ‘황제의 나라’라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우리 역사가 부끄럽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자책만 할 것이 아니라 발해가 이룬 것과 같은 위대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후세에게 알려 민족의 자긍심을 키워줄 필요가 있다. 


발해는 어떤 나라?
발해(渤海)는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던 대조영(?~719년)에 의해 698년에 건국해 228년 간 한반도 북부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 및 하바롭스크 변경주 일부 등에 걸쳐 존속했던 국가이다. 제3대 문왕 대에 황제국 체제를 갖췄다. 당도 발해의 국력을 무시 못해 바다 동쪽의 번성한 국가란 의미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했다. 925년 12월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926년 초에 멸망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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