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96] 당신의 슬픔은 당신만의 것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96] 당신의 슬픔은 당신만의 것
  • 송호빈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
  • 승인 2023.06.19 09:46
  • 호수 8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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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슬픔은 당신만의 것

이런 말들은 구경하는 사람들의 억측일 뿐 취한 사람의 진정(眞情)은 아니니 어찌 그리도 슬퍼하는지는 모름지기 취한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취한 사람은 무슨 일로 그렇게 슬퍼하는 것일까?

是乃觀者臆量耳,  非醉人眞情,  須問醉人所慟.  醉人所慟何事?

시내관자억량이,  비취인진정,  수문취인소통.  취인소통하사?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燕巖集)』 제10권 별집,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슬픔은 어디에나 있다. 길을 걷노라면 그것이 뒤를 쫓아와 오른쪽 어깨를 건드리며 앞질러 가고 혹은 앞에서 다가와 왼쪽 옷깃을 스치며 엇갈려 간다. 책을 읽다 문득 고개를 든 여름 한낮, 햇볕이 하얗게 쏟아지는 창틀에 다소곳이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슬픔을 나 또한 올려다보았다. 뜻하지 않게 잠에서 깨어난 겨울 밤중에는 시나브로 이불 밖으로 내어놓은 차가워진 발가락 끄트머리를 설핏 맴돌다 가는 그것의 등허리를 본 적이 있다.

그리하여 어디서도 누군가는 운다. 복사나무 아닌 나무는 한 그루도 없고 복사꽃 아니 핀 가지는 한 가지도 없어, 살구꽃 만발하였던 필운대(弼雲臺)에서 놀던 사람들이 채 열흘도 되지 않아 모두 이곳으로 옮아온 시절. 이날의 도화동(桃花洞)은 잠깐의 멈춤이나 한 치의 틈도 없이 중(中)과 화(和)가 가득하였기에 평소 울근불근하던 연암(燕巖)마저도 마음이 누그러지고 잔잔해졌던 것이다. 이토록 더할 나위 없이 화평한 봄낮의 꽃그늘 아래서도 한 사람만큼은 흐느껴 운다.

우리는 그의 슬픔을 알 수 있을까? 초여름 맹랑한 모기에 물려 서둘러 부풀어 오른 어린아이의 살갗, 돌이켜 보면 어떤 병의 징후였을지도 모를 아내의 사소한 빈혈, 세상에 이로운 재화를 생산하다 기계 속에서 부수어져 버린 노동자의 몸 ― 이들과 마주하거나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적지 않게 슬펐지만 조금도 가렵거나 어지럽거나 아프지 않았다. 아플 수 없었다. 나와 남의 몸이 나뉘어 있는 이상 동정(同情)과 공감(共感)은 정녕 수사(修辭)에 그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울음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복사꽃 아래서 목놓아 울던 사람도 머지않아 울음을 그칠 것이요 모조리 울고 나서 제 슬픔을 스스로 추스를 것이다. 슬픔의 까닭을 묻고자 하여도 울음을 그친 뒤에야 비로소 가할 터인데 아마도 연암은 끝내 묻지 않았으리라. 가섭(迦葉)이 석가(釋迦)의 염화(拈花)에 미소 지었듯 섣부른 헤아림이나 물음을 짓지 않아야 슬픔의 진정에 육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슬픔에 우리가 할 일은 쉬이 남의 슬픔에 함께 아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의 존재를 가만히 인식하는 것이다. 나의 어떤 슬픔으로 미루어 보건대, 슬픔이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어떤 까닭으로든 존재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의 슬픔은 당신만의 것이다

송호빈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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